다시 벌어진 故 박병선 박사 과대포장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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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벌어진 故 박병선 박사 과대포장 논란
  • 홍강희 기자
  • 승인 2023.04.1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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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부터 서지학자와 관련자들 박 박사 역할 지나치게 과장됐다 지적
조선일보 ‘박병선이 직지 첫 발견자 맞나…50년만의 공개가 불러낸 논란’ 보도

 

현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지 표지. 한국자료 109번이라고 쓰여 있다. 

 

현존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됐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가 우리나라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故박병선 박사의 이름이 나온다. 박 박사는 그동안 ‘직지대모’로 알려졌다. 하지만 10여년 전부터 서지학자와 국문학자, 관련자들은 박 박사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본지는 이를 여러 차례 보도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지난 11일 현지에서 직지를 공개했다.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를 계기로 직지를 50년 만에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직지대모라 불렸던 고 박병선 박사의 역할을 의심할 만한 얘기가 나와 주목된다. 조선일보는 프랑스국립도서관이 “1952년 ‘직지’를 기증받기 이전부터 이 서적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며 ‘박병선이 직지 첫 발견자 맞나…50년만의 공개가 불러낸 논란’이라는 기사를 14일 보도했다.

故 박병선 박사는 1972년 직지 영인판을 가지고 한국에 왔다. 80장의 원본 크기 사진을 가지고 와 국내 서지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직지가 자세히 알려졌으므로 업적은 분명히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우상화한 점이다.

故 천혜봉 전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흑백사진으로 찍어와 국회도서관장에게 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회도서관장은 예산이 없자 청와대에 얘기했다. 그러자 문공부장관은 그 사진을 문화재관리국으로 넘겼고, 서지학회는 여러차례 만나 토론을 했다. 거기서 금속활자본이라는 결론을 냈고 내가 대표로 해제를 썼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청주고인쇄박물관 개관 30주년 자료 중 일부
청주고인쇄박물관 개관 30주년 자료 중 일부

하지만 직지연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지난해 개관 30주년 특별전에서 박 박사를 지나치게 우상화해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전시장에 “(중략) 박병선 박사는 도서관 구석에서 잠자던 직지를 찾아내어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주최 전시에 출품, 다시 세상에 직지를 공개하였습니다” “(중략) 기증 후 도서관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직지는 박병선 박사에 의해 발견돼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라고 써 붙였다.

직지를 혼자 찾아내고 고증했다는 것은 박 박사의 말이다. 그는 2005년 흥덕사지 발굴 20주년 학술회의에서 “나는 1967년부터 1980년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유네스코가 1972년을 ‘세계도서의 해’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양학보물 책’이라는 주제 전시회를 열었다. 한국코너를 담당했던 나는 고서를 물색하던 중 구석에 끼어 있던 직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지 마지막 장에 1377년에 인쇄했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무턱대고 믿을 수 없어 고증에 매달렸다. 지우개, 감자, 점토로 실험을 해서 활자로 찍은 인쇄본임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직지의 존재는 이미 1901년 모리스 꾸랑이 쓴 ‘한국서지’ 부록에 나와 있었다. ‘한국서지’는 꾸랑이 한국의 책을 소개한 책이다. 아울러 1972년 책 전시회에 직지를 출품한 사람도 당시 셰귀 동양문헌실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 박사는 정규직원이 아니었고 민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서지학자라고 볼 수 없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또 국제동양학대회는 1973년에 열렸고, 이 때는 이미 국내 서지학자들이 직지가 금속활자본이라는 고증을 끝낸 뒤였다는 것이다.
 

“직지의 가치 오래전 알려져”

남윤성 전 청주MBC 편성제작국장은 “2006년 ‘직지의 최초 발견자 콜랭 드 플랑시’ 취재 당시 콜랭 드 플랑시와 모리스 꾸랑의 전문 연구자이자 한국학 학자인 다니엘 부셰 박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경매시장에서 직지가 앙리 베베르에게 팔려 나간 후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뒤늦게 직지의 세계사적 가치를 알았다. 도서관장이 세 번이나 앙리 베베르에게 찾아가 팔거나 기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사후에 기증하겠다고 했고 그의 재산 상속자가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직지 다큐를 제작하면서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직지의 가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구석에 방치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역사왜곡이나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직지는 이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된 바 있었고, 1901년에는 모리스 꾸랑이 ‘한국서지’ 부록 3738번에서 소개했다. 그리고 도서관은 직지를 기증받고 ‘한국자료 109번’이라고 도서대장에 기록했고, 직지 표지에도 썼다. 이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직지가 현존하는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신용석 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이었다. 그는 지난 2월 24일 인천일보 ‘신용석의 지구촌’ 칼럼에 이렇게 썼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1970년대초부터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은 마리 로즈 세규이(셰귀) 동양서적 담당 사서와 시간제로 그녀를 보좌하던 박병선 여사였다. 1972년도 5월초로 기억된다. 세규이(셰귀) 동양사서는 우리나라에서 1377년 금속활자로 인쇄된 서적이 ‘책의 해’ 특별전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보충취재에 돌입했고 1972년 5월28일자 조선일보는 1면 전체에 ‘고려금속활자 세계최초 공인’이라는 제목의 세계적인 특종기사를 게재할 수 있었다. (중략) 직지 표지에도 1377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책이라고 되어있는데 박병선씨가 발견했다는 설은 이번 기회에 시정되었으면 한다.”

전문가들은 박 박사의 업적이 과대포장된 데에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다. 직지에 관한 각종 홍보물을 만들면서 박 박사의 역할을 지나치게 추켜 세웠다는 것이다. 박 박사에 대해 과대포장된 부분은 하루빨리 시정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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