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외교투쟁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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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외교투쟁 10년
  • 박익규 전문기자
  • 승인 2023.05.1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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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자산 들고 망명해 룽징에 ‘서전서숙’ 세워
유럽‧미국 순회하며 일제의 불법 침략 널리 알려
외교성과 떠나 한국독립 국제문제화 기반 만들어

헤이그 특사 보재 이상설

2023년 대한민국이 외교 안보로 대혼란을 겪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수행 평가에서도 긍·부정의 1순위 모두 외교 분야를 꼽고 있다. 외교를 바라보는 견해가 정반대인 셈이다. 전문가 영역인 외교 안보마저 이젠 모든 국민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정부는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사상 최고의 투자유치 성과를 거둔 워싱턴 선언이라며 새로운 한일 관계를 띄우기에 한창이다. 반면 굴종적 조공외교, 빈손, 매국외교로 윤석열 정부의 경솔한 외교적 언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외교적 대전환기를 맞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보재 이상설 선생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118년 전인 1905, 빼앗긴 외교권을 되찾고 일제 을사늑약의 불법 부당함을 알리고자 헤이그 밀사로서 유럽과 미국을 순방한 이상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마침 지난 426일 충북 진천군 산척면 숭렬사에선 보재 이상설 선생의 106주기 추모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올해 하반기에는 이상설 선생 기념관이 완공될 예정이다.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의 비밀 특사로 구미 순방에 나선 외로운 여정을 시작으로 보재 이상설 선생을 5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와 사무를 감리지휘할 것이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것이다을사늑약 제1조 내용이다.

19051117일 일제는 일본 헌병의 총칼 아래 강제로 대신회의를 열고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완용·박제순·이근택·이지용·권중현 등 5명의 대신이 찬성하니 우리는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른다.

이튿날 이상설은 이 조약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해도 나라는 망할 것이니 황제(고종)는 사직(社稷)과 함께 순사(殉死)하기로 결심하고 5적을 죽이고 조약 파기를 선언하라는 요지의 상소문을 시작으로 5차례 상소와 함께 의정부 참찬 직을 내던졌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이상설을 자고로 난세를 당하여 강직한 신하의 간언은 있었지만 막중한 군왕의 목숨을 끊는 순사직(殉社稷)을 간한 신하는 그에게만 있었던 충언이라고 평론했다.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자결이 잇따랐다. 민영환에 이어 조병세, 이명재, 홍만식, 송병선, 이상철, 김봉학이 애통한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이상설은 종로 네거리에서 수많은 민중을 앞에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의 이 조약은 지난날의 전쟁과 다른 것이다. 나라가 망하였는데 백성이 깨닫지 못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조약이 한번 이루어짐에 나라는 망하고 민족이 이를 따라 멸종하게 된 것이다. 내가 민영환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함을 탄식하여 우노라라는 연설을 한 다음 땅에 뒹굴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다.

이상설의 자결 미수 이후 전국 곳곳에서 유생들이 줄지어 조약 파기와 5적 처벌의 상소를 올려 그 수가 5000통에 달하였으며 시민들은 철시와 시위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다. 국권을 잃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을사늑약부터 더욱 불타올랐다.


룽징에 민족학교 서전서숙 건립

보재 이상설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보재 이상설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이상설은 민족의 명운을 건 독립을 실행하기 위해선 국내에서만 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문수학한 우당 이회영 선생 실기에 따르면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의 정리로 친척을 떠나고 조상의 묘를 버려두고서 황막한 변방에 가 외로이 지내며 고생하는 것은 다 어려운 일이지만 조국과 민족이 중대한지라 지금 평탄한 것과 험한 것을 어찌 가리겠는가. 내가 재주 없는 사람이지만 만주에 나가 독립운동을 펴 보겠다고 이상설 망명의 변을 적고 있다.

1906418일 이상설은 눈물을 흘리는 이회영 등 동지들을 웃는 얼굴로 이별하고 인천에 가서 중국인 상선을 타고 상하이로 잠항했다.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중국 룽징촌(龍井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서 가산을 정리한(현 시가 100억 원 추정) 이상설은 같은 해 8월 룽징에서 첫 근대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장을 맡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19073월 이상설은 고종으로부터 헤이그 사행 특명을 받고 서전서숙을 여준 등에게 맡기고 이동녕, 정순만을 대동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서전서숙은 같은 해 10월까지 운영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폐숙했다.


헤이그 만국회의 정사로 활동

국내에서 잦게 회합했던 평리원 검사 이준으로부터 광무황제의 밀지를 전해 받은 이상설은 5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64일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 이범진·위종 부자(父子)를 만나 장서(공고사)를 번역한다.

그곳에서 러시아 외무성의 동정을 살피다가 6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다. 헤이그시 바겐슈트라트 거리 124번지 용스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문전에 태극기를 게양, 한국 대표사절단임을 밝힌다.

628일 장서와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책을 불어로 만들어 일본을 제외한 40여 참가국 대표위원들에게 보내고, 다음날 러시아 대표이며 평회의의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을 방문했으나 주최국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했다.

다음날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어 다음날은 부회장인 네덜란들의 전 외무장관 테스에게 서한을 급송해 면회를 요청했으나 외면당했다.

평화회의에 참석해 일제에 짓밟히는 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시키고자 최선을 다했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 성격을 띠었기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한 주장을 명백히 밝힌 공고사가 630일자 평화회의보에 게재되었고, 79일에는 이위종과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연설해 국제여론에 한국 문제를 부각시켰다.

애석하게도 714일 저녁에 특사 중 한 명인 이준이 순국했다. 일제는 헤이그 사행을 꼬투리 삼아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국가의 내정까지 그들 통감부에서 맡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했으며, 전국의 군대가 해산되는 격동을 겪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상설에게는 궐석재판에서 사형, 순국한 부사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형의 선고를 내리기까지 하여 충신이 역적으로 불리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유럽·미국 조야에 조력 호소

4월 22일 진천군 진천읍 숭렬사에서 열린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6주기 추모식에서 송기섭 진천군수가 초헌관으로 나서 잔을 올리고 있다.
4월 22일 진천군 진천읍 숭렬사에서 열린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6주기 추모식에서 송기섭 진천군수가 초헌관으로 나서 잔을 올리고 있다.

1907년 헤이그 사행 이후 이상설은 매우 바쁜 일정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순방하면서 한국의 독립지원을 요로에 호소했다. 그들의 순방외교는 만국평화회의 활동의 연장으로 직접적인 국권 회복을 위한 열강에 대한 외교였다.

이상설은 이위종, 윤병구, 송헌주 등을 대동하고 1907719일경 헤이그를 떠나 영국을 방문한 뒤 81일에는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에 들렀으나 미국 대통령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면회조차 거절했다. 이들 일행은 뉴욕,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등을 다니면서 미국 조야에 일제 침략의 잔혹성과 을사늑약의 폭력성을 설파해 국권 수호를 위한 국제적 조력을 호소했다.

그 후 이상설은 임시 매장한 이준의 장례를 현지에서 치루기위해 9월 초에 다시 헤이그로 돌아갔다. 그 일행은 다시 96일 헤이그를 떠나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을 방문하고 이탈리아 로마 등을 거쳐 북쪽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다시 찾았다가 1030일에 다시 런던으로 가서 활동하였다.

이상설은 이듬해인 19082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남짓 활동했다.

미국에서 이상설은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열린 애국 동지 대표회를 주도해 미주지역 한인사회에서 통합운동의 계기와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19092월 국민회를 조직, 미주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사회 전체를 하나의 단체로 통합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국민회 결성 직후 1909422일 러시아 연해주로 출발하기까지 유럽과 미국, 중국 지역 등 동서대륙과 해양을 횡단하는 수만 리의 장정을 초인적인 혼신의 열정을 다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신명을 바쳤다.

외교적 성과로만 보면 국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지지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이 그들의 극동 정책 이해를 위해 일본의 한국 보호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방조하던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설의 순방외교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상설을 비롯한 특사 일행에 대해 구미 열강은 공식적으로 자국의 이해와 실리를 생각해 그들의 주장과 호소를 외면하였을망정, 각국 조야는 특사들을 통해 일본의 난폭한 한국 침략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극동평화를 위한 한국독립문제가 국제정치의 일면임을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상설의 순방외교는 헤이그 사행과 함께 그 뒤 해외 민족운동가들이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문제를 제기하는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향후 독립운동의 초석을 놓게 된다.

박익규

음성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살아온 충북 토박이다. 중부매일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문화교육체육팀에서 20여 년간 기자, 부국장으로 일했다. 충북도지사 연설기록담당관, 충북인재양성재단 사무국장으로 6년 재임했다. 자신의 삶과 사회 발전을 두루 고민하며 조화롭게 제2의 인생을 사는 중장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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