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을 잇는 뫼비우스의 띠 ‘등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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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잇는 뫼비우스의 띠 ‘등신불’
  •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23.05.18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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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하여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의 역설

미라라고 하면 우린 가장 먼저 이집트를 떠올린다. 하지만 사람의 육신을 보존하는 미라의 풍습은 전 세계 곳곳에 있으며, 심지어 한국에도 미라를 주제로 한 소설이 있다. 바로 김동리(1913~1995)의 소설 중에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등신불이다. 김동리는 20세기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며 유독 유독 역사와 옛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다.

등신불은 자신의 몸을 살라 불법의 뜻을 이룬 당나라 시절의 어떤 승려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일본에 유학 중 전쟁을 맞이하여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 난징(南京) 부근에서 탈영한 한국인의 입을 빌려 전개된다. 전쟁의 화를 피해 불의(佛意)에 귀의한 주인공은 자기가 머문 절에서 당나라 시절672(당 중종 16)에 어머님의 죄를 대신하여 소신공양으로 한 입적한 만적의 이야기를 듣는다.

 

잣나무 상자에 가부좌를 튼 채로 묻혔던 라마승 이티길로프는 유언 대로 75년 만애 생전 모습 그대로 등신불로 돌아왔다. 이티길로프의 생전(왼쪽)과 현재.
잣나무 상자에 가부좌를 튼 채로 묻혔던 라마승 이티길로프는 유언 대로 75년 만애 생전 모습 그대로 등신불로 돌아왔다. 이티길로프의 생전(왼쪽)과 현재.

 

만적의 재가한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자식인 만적을 위하여 의붓자식들을 독살하려고 했다.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아무렇지 않게 죄를 지으려는 어머니에 충격을 받고 불법에 귀의한 그는 어머니의 죄를 빌며 입적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일체의 곡기를 끊고 참선을 하다가 정해진 때가 되자 몸에 기름을 붓고 소신공양을 했다. 이후 그의 시신에 금칠을 하여 등신불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김동리의 이야기는 너무 구체적이지만 정작 어떤 자료나 이야기에 기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는 등신불의 풍습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다만, 김동리의 소설에서 나오는 것 같은 소신공양을 하지 않고 참선을 통해 스스로 미라로 만든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볼가 다찬의 이티길로프 사원. /사진=강인욱
이볼가 다찬의 이티길로프 사원. /사진=강인욱

 

소련의 탄압을 지켜낸 등신불

 

지난 2015년에는 네덜란드의 한 박물관에서 실제 등신불이 발견된 적도 있다. 이 박물관에는 오랫동안 보관 중이던 중국 불상이 있었는데, 불상의 밑바닥에서 사람의 의복 조각이 삐죽 나와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그 안에는 실제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 놀라운 소식이 세계 곳곳에 전해지자 난리가 난 곳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이었다. 그 불상은 1995년에 푸젠성(福建省)의 한 마을에서 도난당한 등신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라져 버린 불상은 이후 헝가리의 수집가를 거쳐서 네덜란드로 밀반출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 불상의 실제 주인공은 북송 시기인 서기 1100년 경에 죽은 장공조사(章公祖師)였다. 단순한 불상이 아니라 고승의 시신이 밀반출된 셈이니 중국에서는 강력히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네델란드에서 발견된 등신불 미라
네델란드에서 발견된 등신불 미라

 

한편, 소련 시절에 심하게 탄압받았던 시베리아에 티베트 불교를 전하던 스님의 미라도 유명하다. 러시아 바이칼 근처 부랴트 공화국의 라마승 이티길로프(1852~1927)의 미라가 대표적이다. 그는 군대를 업으로 하는 부랴트 코사크 출신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불교에 정진할 수 있었고,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 참전한 수많은 부랴트 출신의 군인들을 위해 애를 썼고, 그 후에 캄보 라마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노년에 바이칼과 몽골 일대의 불교계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17년에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몽골도 1921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꺼져가는 불교의 명맥을 잇기 위해 참선 자세로 열반에 올랐고, 75년 뒤에 다시 꺼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시신은 가부좌 상태로 잣나무 상자에 담겨서 묻혔다가 유언에 따라 2002년에 다시 개봉되었다. 입적했을 때의 모습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가 유언한 75년이 지나고 나니 사회주의의 광풍은 끝나고 다시 종교가 부활하던 시점이었다. 이에 그의 미라를 울란우데 근처의 이볼가 사원에서 다시 모셨고, 다시 번성하는 라마교의 상징이 되고 있다. 엄청난 종교의 탄압을 견딘 등신불인 셈이다.

이웃 일본에도 소쿠신부츠즉신불(卽身佛’)이라는 이름으로 미라가 된 스님을 모시는 풍습이 남아있다. 일본에서도 특히 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700여 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20여 개의 미라가 남아있다.

 

죽음의 고통을 견디는 참선

 

죽은 다음에 만드는 이집트의 미라와 달리 불교의 미라는 살아있을 때 미라가 되는 과정을 거친다. 살아생전에 죽으면 먼지가 되는 자연의 섭리를 이겨내고 미라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김동리의 등신불에도 만적이 참선 자세로 앉아서 모든 곡기를 끊은 채 매일 깨기름을 마시고 몸에 발랐다고 한다.

한편, 일본의 스님들은 깨 대신에 솔기름을 먹는다고 한다. 나라마다 전하는 비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대체로 일체의 탄수화물의 섭취를 중단하고 몇 달에 걸쳐서 몸을 천천히 미라화시킨다. 최근 현대 과학에서는 스님 미라를 연구한 결과 이렇게 입적하기 위한 준비과정 자체가 미라화를 만들기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동리의 기록은 비록 소설이지만 매우 정확한 기록인 셈이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장기 속에 있는 음식물과 세균들이 부패하면서 빠르게 시신은 해체가 된다. 하지만 등신불이 되고자 하는 스님은 참선하며 일체의 곡기를 끊고 기름을 먹고 몸에 바르는 과정을 수개월 지속한다. 그 결과 입적 뒤에도 내장과 피부에서 수분은 거의 사라져 몸을 부패시킬 수 있는 미생물이 번식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이러한 입적의 과정은 인간의 몸으로는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욕망을 끊고 몇 달간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과도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미라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열반에 들었음을 의미하는 살아있는 표본인 셈이다.

 

등신불, 그 역설적인 깨달음

 

왜 사람들은 미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까. 그 핵심은 바로 살아있음이다. 누구도 그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어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으려는 인간의 덧없는 생각을 합리화할 수 있는 가장 큰 표지는 바로 시신 그 자체다. 죽어서도 육신이 남아있는 것만큼 가장 강력한 영생의 증거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영생의 상징인 등신불 미라가 되기 위하여 그 주변 환경은 역설적으로 죽어있어야한다.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죽이는 것은 물론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시켜서 몸을 부패시키는 모든 미생물의 번식도 없애야 가능하다. 미라의 핵심은 살아있음이 아니라 모든 미생물의 활동이 억제되고 죽어있음에 있다. 불교는 육체의 질곡을 벗고 해탈하여 열반에 오르는 것을 강조한다. 오히려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상이니 시신으로 수백 년간 보존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역설적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은 주지 스님이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탈영하고 절에 귀의하고자 혈서를 쓴 주인공의 일그러진 손가락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난다. 손가락을 희생해서라도 살고자 하는 주인공과 자신의 몸을 바쳐서 불법을 전하려는 만적의 바람은 결국 같다는 뜻일 것이다.

죽어있는 시신을 통해 살아있음을 꿈꾸는 우리의 바람이 있기에 삶과 죽음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이어주는 등신불과 미라를 만드는 풍습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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