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성, 산정마을 에리체(E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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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성, 산정마을 에리체(Erice)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05.1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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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질병을 피해 꼭대기를 자처한 고립

정연일의 지중해 섬기행③

왜 저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마을이 있죠? 저기에 사람이 사나요? 이탈리아 투어 중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이탈리아에는 산꼭대기에 위치한 마을과 도시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확실히 많다. 실제로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반도를 여행하다 보면 산꼭대기 마을을 하루에도 여러 번 본다. 특히 로마에서 피렌체 가는 A1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차창 너머 오르떼(Orte) 나 오르비에또(Orvieto) 같은 유명한 산정마을을 볼 수 있다.

트라파니 염전에서 바라본 에리체(붉은 박스 안) 사진= 정연일

산꼭대기 마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탈리아의 태양이 워낙 뜨거워 더위를 피해 조금이라도 시원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는 설, 중세 시절 흑사병이 대유행할 때 피난처로 산꼭대기에 마을을 짓고 외부인을 통제했다는 설, 속세와 떨어진 산꼭대기에 사원 같은 종교적 시설을 짓고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됐다는 설 등이다. 가장 신빙성이 높은 설은 잦은 전쟁과 외침 때문에 방어에 유리한 고지에 마을이 형성됐다는 설이다.

여러 나라로 분열됐다가 통일이 되고 왕조가 이어지는 우리 역사와 달리, 서기 476년 전 유럽을 통일했던 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하며 여러 도시 국가와 왕국으로 쪼개졌다. 선통일 후분열을 겪은 셈이다. 이후 길고 길었던 중세 시절 이탈리아 내의 도시국가와 왕국은 치열한 경쟁과 잦은 전쟁을 치렀다, 이탈리아의 산정마을을 다녀보면, 마을이나 도시를 설계할 때 무엇보다 방어에 가장 치중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골목의 끝에 바다가 나타나기도 한다. 사진= 정연일

시칠리아 섬의 서쪽 끝, 트라파니 인근에도 산꼭대기에 위치한 산정마을이 있다. 트라파니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해발 750m의 에리체 산정에 위치한 마을 에리체(Erice)이다. 역사는 고대 그리스 식민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칠리아섬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이후는 로마, 로마 이후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아글라브 왕조와 노르만 (바이킹)의 지배를 받았다. 현대에 들어서는 2차 대전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풍광 즐기는 케이블카 추천

트라파니에서 에리체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렌터카 또는 차량이나 버스로 에리체 마을까지 올라가는 방법이다. 길이 매우 구불구불하고, 주차장도 협소한 편이라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시내버스는 두 어 시간에 한 대 있을 정도로 간격이 매우 길어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추천하는 방법은 이탈리아어로 푸니 비아(Funi Via)라고 부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트라파니 시내에서 케이블카 정류장까지는 거리도 그리 멀지 않고 시내버스도 자주 있다. 케이블카 요금도 저렴하고, 날씨가 좋으면 트라파니와 지중해의 멋진 풍광도 즐길 수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트라파니 사진= 정연일

차량이나 케이블카 어느 쪽으로 올라가든, 에리체 마을의 성문 입구에 도착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의 산정마을은 외부 침입을 방어하는 데 유리하게 형성되었기에, 대부분 마을의 주 출입구는 하나다. 삼면 혹은 사면이 깎아 지른듯한 절벽 위에 있고, 성벽을 둘러 쌓거나 석조 건물을 빈틈없이 붙여서 지어 성벽의 역할을 하게 한다. 마을의 중심에는 광장이 있고, 메인 게이트로 들어서면 마을의 중심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마을의 번화가이자 중심도로이다. 중심도로를 따라 상점과 식당이 늘어서 있다. 에리체도 역시 그렇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에리체 대성당(성모승천성당)과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유럽여행 특히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 하루에도 여러 번 성당을 만난다. 여행 초기는 건축물의 장대함과 이국적 풍광에 반해 들르지만, 여행 후기에는 대부분 여행자가 성당을 지나친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에서 두오모라고 부르는) 각 마을과 도시의 대성당 한 곳은 꼭 들러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축부터 종교, 문학, 미술, 음악 등 성당은 당대 모든 지식의 집결체이기 때문이다.

에리체 대성당 (성모승천성당)의 외관. 사진= 정연일

거기에 시칠리아의 성당은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시칠리아의 외래 지배세력이 남긴 아랍 노르만양식이다.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아랍과 노르만의 지배를 받았던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 일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에리체 대성당 역시 아랍 노르만 양식이 남아있다. 입장권을 끊고 성당의 내부에 들어가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성당에 와 있는게 아니라 마치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크루즈 선박이 트라파니에 입항하면 크루즈 선에서 하선한 관광객으로 작은 에리체의 중심도로가 인파로 붐빈다. 그런데도 에리체 대성당의 내부는 사람이 없고 고요하다. 종교 여부, 신앙심의 여부와 별개로 에리체 대성당은 꼭 들러 볼만한 곳이다. 작지만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당이다.

성당의 천장 장식이 이슬람 건축양식이다. 아랍 지배의 흔적이자 아랍 노르만 양식. 사진=정연일

 

천공의 성과 볼라레

붉은 돼지를 비롯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작품의 배경은 유럽, 특히 이탈리아가 많다. 천공의 성 라퓨타도 이탈리아의 산정 마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로마와 피렌체 중간 거리의 언덕 위 도시 치비타 디 바뇨레조가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되었다고는 하나, 명확한 근거는 부족해보인다. ‘그렇다더라는 도시전설에 가깝다. 오히려 해발 750m의 좁은 산정에 자리 잡은 에리체가 천공의 성이라는 이름에 더 어울린다.

이탈리아반도 내륙의 산정마을과 에리체의 차이라면, 에리체는 시칠리아 반도 서쪽 끝에 위치했기에 푸른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에리체에 오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외에도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 칸소네 볼라레(Volare)’ 가 떠오른다, 볼라레의 뜻은 날다(fly). 집시 킹의 노래가 유명하지만 원곡이 아니라 리메이크다. 원곡은 1958, 리메이크는 1989년에 각각 나왔다.

에리체에서는 어디에서나 바다가 보인다.  사진= 정연일

원곡의 제목은 볼라레(Volare)가 아니라 넬 블루 디 핀토 디 블루(Nel blu, di pinto di blu)였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푸른색 안에(in the blue, painted blue)라는 뜻이다. 노래를 듣다 보면 볼라레 워워어 깐따레 워워워워다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중첩된 의미와 표현이다. 그만큼 짙푸르다는 뜻이다. 맑은 날 지중해의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 빛깔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도메니코 모두뇨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어느 날, 술집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가 짧지만 강렬한 꿈을 꾸었다. 손과 얼굴이 푸르게 물들고, 바람이 불며 샤갈의 그림처럼 몸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데 정말 행복하고 황홀하더라..는 꿈 내용이 가사다. 최초의 제목이 푸른 꿈 Dream in blue 였던 이유다. 그는 평소에 샤갈의 그림을 좋아했기도 했지만, 마침 꿈에서 깨어났을 때 눈앞의 술집 벽에 샤갈의 그림 복제본이 걸려 있었다고. 꿈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쓴 곡이 볼라레 Volare’ 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전 위에 세워진 12세기 노르만성, 카스텔로 디 비네레(비너스) 사진=정연일

지중해가 한 눈에 내려다 뵈는 에리체의 요새 전망대에 오르니, 하늘과 바다가 모두 파랗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헷갈릴 정도다. 지중해 바다색은 푸름에 푸른색을 덧칠한 것 같다.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파랗게 물드는 것 같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건조하고 쾌적한 바람을 맞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노래가 절로 나온다.

 

볼라레 fly~ 워워워~

깐따레 sing~ 워워워워~

넬 블루, 디핀토 디 블루~

in the blue, painted blue

에리체 시내 중심 광장. 마침 지역 농수산물을 홍보하는 전시 부스가 많았다. 사진= 정연일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현재도 유럽을 여행 중이다. 글과 사진은 여행 중에 보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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