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대한광복군 정부 건립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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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대한광복군 정부 건립 주도
  • 박익규 전문기자
  • 승인 2023.06.0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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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동에 독립운동기지 개척하고 13도의군 편성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외교 병행·민족단합 주도
48세로 순국했지만 임정 등 독립운동 방향 정립

헤이그 특사 보재 이상설

1906418일 망명길에 오른 이상설은 중국 룽징에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한 뒤 이듬해인 6월 고종의 밀지를 받아 헤이그 사행에 나선다. 이어 구미순방에 나서 일제의 불법 부당한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해외동포의 민족독립운동 기반을 다진 뒤 19094월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다.

한국을 떠나 3년 동안 러시아, 중국, 유럽, 미국 등을 돌고 이준 열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시 유럽행과 미국행을 반복한 외롭고 고달픈 여정이었다. 어느 나라 누구로부터도 초대받지 못하고, 외교권마저 빼앗긴 나라의 황제 특사였지만 그는 결코 낙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조국 광복 민족 독립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일분일초를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1917년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기까지 이상설의 독립운동 10년을 지난 기사에 이어 되돌아 본다


1909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민회 이사회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최정익, 이상설, 허재정, 정재관.
1909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민회 이사회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최정익, 이상설, 허재정, 정재관.

1909년 여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이상설은 한민회 회장인 김학만과 해조신문 주간 정순만, 윤일병, 차석보 등의 교포 지도자를 규합했다. 이어 한민족의 새로운 집단 이주지를 물색하고 그곳의 토지를 사들이기 위해 모금 운동을 폈다. 교포 유지와 국내로부터 자금 마련은 물론 약속된 대로 국민회 등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연말까지 제1차로 5000달러를 보내왔다.

이상설은 망명 유학자 강재(剛齋) 이승희(李承熙)를 찾아 그의 독립운동의 경륜을 말하고 봉밀산 지역의 기지 마련에 앞장 설 것을 협의했다. 봉밀산 밑의 기름진 터전을 골라 우선 45(, 가로·세로 각 45)의 토지를 사들이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가 되는 한흥동을 건설하는데 힘썼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100여 가의 한민족이 이주했다. 또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韓民學校)라고 했다. 이상설은 한흥동을 자주 찾아가 모든 경영을 보살피고, 이승희는 한흥동에 4년 동안 머무르면서 그곳을 한민족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승희는 여기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고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민족의 단결을 꾀했다.

이상설의 한흥동 건설에 호응하여 국내에 있는 신민회(新民會)는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설정이 곧 독립운동의 당면 과업이라는 것을 내세우게 되었다. 신민회의 중요 간부이던 안창호·신채호·조성환·이종호·김의선·유동열 등은 중국 칭다오에서 19104월에 청조회담을 열어 밀산부 지방에 미개간의 땅 10만평을 사들여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안창호는 연해주에서 1년 동안 그곳을 경영하는 등 한흥동은 그 뒤 독립기지 건설사업의 첫 출발이었다.


국내진공 목적 13도의군 편성

19078월의 군대 해산을 계기로 국내뿐만이 아니라 북간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1908년 이후로 두만강을 넘나든 의병 활동이 펼쳐졌다. 이들은 1개 사단이 넘는 일본 국경수비대의 방위망을 뚫고 국내로의 진공 작전을 되풀이 했다.

이같은 의병의 중심 인물은 1902년 간도 관리사를 지내다가 러·일전쟁때부터 항일을 표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한 이범윤이었다. 그는 교포 부호인 최재형과 힘을 모아 3000~4000명에 달하는 의병을 모아 현재 크라스키노라고 부르는 노우키에프스크(煙秋)를 중심 기지로 삼고 활동했다. 이밖에도 김영선·오몽서·엄인섭·전규무·안중근 등의 의병장이 이범윤의 산하에서 활동하거나 또는 따로 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북간도 장백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연해주로 옮긴 홍범도 의병부대도 있다.

이상설은 러시아 내 의병의 국내 진공을 위한 부재개편과 군자금 모집을 유인석·이범윤 등과 협의하고 추진했다. 그 결과 1910621일에는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편성되고 도총재에 유인석을 추대했다.

이상설은 그해 728일 도총재 유인석과 연명하여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13도의군의 편성은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큰 계획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군비가 부족하므로 내탕금에서 군자금을 보태어 달라고 청했다. 다른 하나는 광무황제로 하여금 러시아령 연해주에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청원이 광무황제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해주에서 성명회 결성

이상설은 1910827일 블다디보스토크 신한촌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 목적은 ()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 회명(會名)의 뜻은 성피지죄 명아지원(聲彼之罪 明我之寃;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한을 선명한다)에서 땄다. 이상설의 사상은 광복을 위해 한국민의 모든 역량과 수단을 모아 항일독립운동에 나갈 때 민족의 시련을 극복하고 독립의 영광을 찾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설은 성명서를 통하여 이 취지를 내외에 알리고자 했다. 아울러 일본에는 국제공약에의 배신(背信)’을 책하는 공한(公翰)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의 성명서를 보냈다.

이 선언문에는 아주 짧은 시일동안 유인석·이범윤·김학만·김좌두·홍범도·정재관·이규풍 등을 비롯한 중국·러시아 영토 원근에 산재하는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가 포함된 86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서명했다.


권업회에서의 활동

제정 러시아는 합일합방 전후 일시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상설을 비롯한 자국내 중요 독립운동자들을 구금 추방했다. 그러나 이상설은 러시아 당국의 예우로 1911년 니콜리스크에서 풀려나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고 권업보(勸業報)라는 기관 신문까지 발행했다. 권업회는 성명회 선언문에 서명했던 8000여 명이 거의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간도에서 활동했던 이동휘까지 회무를 위하여 곧 초청되었다.

이상설이 19148월까지 권업회를 발전시키면서 조국독립이라는 큰 경륜을 펴는 동안 순탄한 길만 걸어간 것이 아니다. 1913년말에는 어떤 사이비 애국자가 이상설을 매장코자 일제의 밀정으로 몰아넣는 음모까지 있었다. 그때 이상설은 아무 변명도 없이 모든 공직을 깨끗이 내놓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바로프스크로 거주지를 옮겨 머물렀다. 이 무렵 그는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조차 잃어 우노라(泣國泣家又泣己)”라고 하는 비창한 시를 읊었다.

그러나 이상설이라는 큰 인물은 북도인이든 남도인이든 신래구래(新來舊來)의 어느 계층이든 모두에게서 숭앙을 받았으므로 곧 각 파의 지도자들이 그를 중심으로 다시 단합하여 권업회를 이끌어 갔다.

권업회의 표면적 활동은 19148월 창설되니 지 3년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정지되었다. 러시아 당국이 일제와 군사동맹을 맺으며 전시정책을 써서 일체의 정치활동은 물론 사회활동까지 엄단했던 까닭이다.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

이상설은 마침내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민족의 망명정부라 할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을 주도하였고 그는 정도령(正都領)에 선임됐다. 이 정부는 광복군을 주축으로 한 국내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할 중추기관으로 만들었으며, 일제의 의한 민족 수난기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로 이름을 남겼다. 이상설의 나이 45세 때의 일이고 1910년 경술국치로부터 4년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을사년으로부터 10년째의 일이다.

이상설은 이동휘·이동녕·정재관·이종호 등과 그동안 중국·러시아 영토안에서 규합한 모든 동지를 단합시켜 군정부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해 8월 서구에서 먼저 일어나고 제국주의 실리에 밝은 러시아와 일본은 곧 동맹국으로 제휴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러·일간의 공동 방위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이에따라 러시아 당국은 자국 안에서의 모든 정치·사회활동을 금했다. 위험한 인물은 가차없이 투옥하고 추방했다. 그러므로 이상설의 군정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군정부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신한혁명당의 조직

우수리스크 수이픈 강가에 세운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수이픈 강가에 세운 이상설 유허비.

남다른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을 가진 이상설은 전쟁의 추이를 살피면서 광복군의 무장과 독립전쟁의 준비체제를 갖추어 갔다. 곧 이상설은 19153월 상하이 영국 조계의 배달학원에서 중요 민족 운동자와 함께 독립운동에 관한 주요 방략을 협의했다. 상하이에 있던 박은식과 신규식을 비롯해 칭다오에서 간 조성환, 시베리아에서 간 유동열, 국내에서 간 유홍열과 이춘일 등 여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전쟁의 추이를 분석하면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했고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면서 광복군의 무장과 독립전쟁 추진을 결의했다.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려던 이상설은 191732일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4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젊어서도 병약하여 몇 차례 요양하던 그는 10여 년 동안 해외에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조국광복에 심신을 바쳐왔다. 1916년부터 피를 토하는 중병으로 누워 1년을 두고 투병했으나 아무 효험 없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는 내 몸을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리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만 남겼다.

그의 임종을 지킨 이동녕·백순·조용철·김완수·이민복 등은 그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서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날리고 유골마저 가루를 만들어 날렸다. 이때 그의 문고와 유품 등도 알뜰히 거두어 불살랐다.

이상설의 유업은 컸다. 그가 작고한 2년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3·1운동이라는 거족적 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상설의 가까운 동지인 이동녕·이시영·조성환·이회영·이동휘 등은 그의 유업을 계승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 국내외 독립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이상설이 오랫동안 망명했던 시베리아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어 독립결의를 새로 다짐하면서 일제와 혈전을 선언했다.

또한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에서는 그동안 양성된 광복군을 바탕으로 군정부(軍政府)가 세워지고 많은 독립군단이 항전체제로 정비되어 1920년대의 항일전이 펼쳐졌다. 미주의 한인들은 독립대회를 열어 세계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외치고 항일 군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새로운 각성과 민족역량의 향상을 꾀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한민족의 광복이 보다 밝게 비쳤다.

이 기사는 이상설 선생 탄신 138주년기념 학술강연회 윤병석 교수 발표자료를 참고했습니다

박익규

음성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살아온 충북 토박이다. 중부매일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문화교육체육팀에서 20여 년간 기자, 부국장으로 일했다. 충북도지사 연설기록담당관, 충북인재양성재단 사무국장으로 6년 재임했다. 자신의 삶과 사회 발전을 두루 고민하며 조화롭게 제2의 인생을 사는 중장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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