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아름다움은 컨텍스트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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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아름다움은 컨텍스트 때문
  • 권재술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3.07.06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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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오관으로 괸찰 가능한 것만 존재하는 걸까?

 

미국의 시인이자 사회활동가인 뮤리에 러카이저는 세계는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듣기에는 참으로 거북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도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존재란 무엇일까요? 책상이나 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공기도 존재할까요? 물론입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바람이 불면 공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너지도 존재할까요? 중력이나 힘도 존재합니까? 더 나아가서 정신은 존재합니까? 마음은? 영혼은? , 하느님은 어떻습니까? 천당, 지옥은 존재합니까? 이쯤 되면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갈 겁니다.

우리의 오관으로 관찰 가능한 것만 존재하는 걸까요? 하지만 우리의 오관은 그렇게 좋은 관찰 도구가 아닙니다. 눈이 아무리 좋아도 공기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바람이 불면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원자도 특수한 현미경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쿼크와 같은 소립자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미래에는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볼 수 없는 것도 존재합니다.

나는 존재를 텍스트적인 존재와 컨텍스트적인 존재로 구분하기를 좋아합니다. 활자로 찍힌 글자들이 바로 텍스트입니다. 책은 텍스트로 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를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의미는 텍스트만으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문장을 읽지만, 문장만 아니라 행간도 읽습니다. 문장이 의미하는 맥락 즉, 컨텍스트를 읽고 있는 겁니다. 어떤 때는 텍스트보다 컨텍스트가 더 중요합니다.

좋은 글은 텍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로부터 만들어지는 컨텍스트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나 예술이 그렇습니다. 시인은 아픈 것을 아프다, 슬픈 것을 슬프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프다,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문장의 맥락으로부터 아픔이나 슬픔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가 문학이나 예술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고 합시다. 정원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나요? 정원의 꽃에 있나요? 아니면 모퉁이에 서 있는 이상한 모양의 정원석에 있나요? 정원의 아름다움은 정원에 있는 나무도, 꽃도, 정원석도 아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있습니다. 나무, , 정원석을 정원의 텍스트라고 한다면, 정원의 아름다움은 컨텍스트입니다.

텍스트적인 존재는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현미경이나 특수한 장치를 사용하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컨텍스트적인 존재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정원의 아름다움은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이기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원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정원의 아름다움은 어느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의 존재보다 더 존재스러운 존재가 아닐까요? 정원의 가치는 꽃 한 송이나 나무 하나가 아니라 바로 이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정신이라는 것도 컨텍스트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니 정신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정신은 뇌의 신경세포가 만들어내는 컨텍스트입니다. 뇌를 다 뒤져도 정신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이 아닐까요?

우리는 존재의 이 텍스트적인 면과 컨텍스트적인 면을 구분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하기도 하고, 일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때가 많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앙의 수준은, 신의 존재를 텍스트적으로 보느냐, 컨텍스터적인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구별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텍스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신이거나 아주 유치한 신앙이 아닐까요? 신이 텍스트적인 존재라면, 신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수염이 있는가?’, 키는 얼마인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권재술
권재술

하지만 신이 컨텍스적인 존재라면 그러한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컨텍스트가 신이라면 그런 유치한 질문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의 삼라만상을 보고도 신이 어디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꽃밭을 보고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세상은 텍스트로 되어 있지만, 세상이 세상다운 것은 컨텍스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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