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상태바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07.06 13: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형을 모르고 상상력도 없으면 폐허는 돌무더기일뿐

정연일의 지중해 섬기행⑨

영화 대부의 주인공이었던 마이클(알 파치노)의 시칠리아 연인이었던 아폴로니아는 그리스계()였다. 지금도 이탈리아에 10만여 명의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의 절반 이상은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해외 식민지였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있다. 시칠리아섬 북쪽 해안가에 있는 팔레르모를 떠나, 시칠리아섬 남쪽 아그리젠토로 간다. 2500여 년 전, 그리스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마그나 그라에시아(Magna Graecia) 시기에 시칠리아섬에 세운 신전을 보기 위해서다.

아그리젠토의 별명은 신전의 계곡(Valley of temple)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230m의 언덕 지대에 고대 그리스 신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에서 가까운 언덕 위에 도시를 세웠다. 이유는 항구에서 멀지 않아 물자와 사람을 수송하기 쉽고, 언덕 위 고지대라서 사방을 관찰하기 좋고 외부 침입을 방어하기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그리젠토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도시는 바다와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있는 곳이 많다. 이를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고 한다.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언덕이 먼저 떠오르지만,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이다.

콩코르디아 신전 앞의 이카루스 청동 조각상. 사진=Pixabay
콩코르디아 신전 앞의 이카루스 청동 조각상. 사진=Pixabay

아그리젠토의 출입구는 두 곳이다.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아서, 보통 높은 곳으로 들어가 낮은 곳으로 나오는 것이 관람하기에 편하다. 높은 곳 출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은 제우스의 부인 헤라(Hera) 신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이지만 로마신화에서는 쥬노(Juno)이다. 헤라 신전은 몇 개의 기둥만 남아 있지만, 신전의 계곡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아름답다. 신전의 계곡 쪽으로 눈을 돌리면, 신전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콩코르디아(Concordia) 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화합과 조화의 여신 콩코르디아


헤라 신전에서 발길을 돌려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 콩코르디아 신전으로 향한다. 콩코르디아(Concordia)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화합과 조화의 여신이다. 현대에서도 콩코르디아 여신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초음속 합작 항공기였던 콩코드 기나 파리의 콩코드 광장 등이 모두 콩코르디아에서 나왔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도 콩코르디아 광장이나 동상을 찾아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괴된 신전에 비해 콩코르디아 신전이 잘 보존되어있는 이유가 아이러니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며 교회로 바뀐 신전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신전은 파괴되었다. 콩코르디아 신전이 살아남은 이유는 그리스로마신화와 기독교의 화합과 조화 덕분이었다.

콩코르디아 신전 앞에서 아기 사진을 찍는 젊은 부부. 사진=정연일
콩코르디아 신전 앞에서 아기 사진을 찍는 젊은 부부. 사진=정연일

콩코르디아 신전은 전형적인 그리스 신전 건축물 양식을 보여준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삼각형 무거운 돌지붕과 정면의 박공(Pediment), 그 아래 줄지어 서서 지붕을 받치고 있는 엔타시스 양식의 돌기둥 열주(列柱). 신전 앞에는 밀랍 날개를 달고 크레타섬의 미궁을 탈출하다가 밀랍 날개를 만든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태양으로 날아가다가 날개가 추락한 이카루스의 청동 조각상이 누워 있다.

이카루스 청동 조각상은 오래된 것처럼 보여 많은 사람이 원래 있었던 거냐고 묻는다. 최근에 만든 것이고, 시칠리아의 아그리젠토뿐만 아니라 나폴리 폼페이 유적에도 곳곳에 청동 조각상이 있다. 오래전에 만든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고대 유적지와 불균형을 이루지 않고 잘 어울린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 예술과 디자인의 나라 이탈리아답다.

그런데 왜 하필 이카루스 일까? 이카루스는 왜 하늘을 날다가 추락했을까?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루스를 이해하려면 크레타섬을 배경으로 한 긴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그늘을 찾아보기 어려운 신전의 계곡. 사진=정연일
그늘을 찾아보기 어려운 신전의 계곡. 사진=정연일

소에게 반해 소와 교접한 크레타섬의 왕비 파시파에, 파시파에가 낳은, 몸은 인간인데 머리는 소였던 미노타우르스, 미노타우르스를 가두기 위해 크레타 왕의 명을 받아 미궁을 설계한 다이달로스, 미노타우르스를 처치하기 위해 아테네에서 크레타로 건너온 영웅 테세우스,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네서 미궁을 빠져나오게 한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 크레타 왕의 분노에 자신이 설계한 미궁에 갇힌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 얘기가 감자 넝쿨처럼 딸려 나온다.

공동체의 화합과 조화를 의미하는 콩코르디아 여신 신전 앞에 인간 개인의 호기심과 자유를 상징하는 이카루스 청동상을 가져다 놓은 이유는, 화합과 자유 모두가 인간에게 필요해서일까?


개인적으로는 폐허 중독자


그리스 신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폐허(Ruin) 유적지를 관람할 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원형 상상도 혹은 복원도를 미리 찾아보는 게 좋다. 그 다음은 상상력이다. 세계의 유적지뿐만 아니라 답사의 고수들이 즐겨 찾는 한국의 폐사지도 그렇다. 원형의 모습을 모르고, 상상력이 없으면 폐허 유적지는 그저 돌무더기가 가득한 지겨운 곳이 되기에 십상이다.

인생의 많은 것을 세상의 폐허에서 깨우친다. 사진=정연일
인생의 많은 것을 세상의 폐허에서 깨우친다. 사진=정연일

콩코르디아 신전에서 발길을 돌려, 무너진 성벽을 따라 아래쪽으로 계속 내려간다. 별다른 건축물이 없는 길게 이어진 길이라 자칫 지루하기 쉬워서인지 곳곳에 아그리젠토에서 발굴한 대리석 조각을 세워놨다. 맑은 날이면 뜨거운 시칠리아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데 그늘을 찾기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상상력이 필요하다.

2500여 년 전 이곳을 지었던 사람들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계속 걷다 보면 헤라클레스 신전과 가장 크고 화려했을 제우스 신전 터가 나온다. 지금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돌무더기 몇 개만 남아 있다. 아그리젠토의 전성기 시절,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아그리젠토 사람들을 보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집을 짓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먹는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현대의 한국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이 놀랍다. 기둥만 남아 있는 제우스 신전 앞에 서니, 개인적으로 폐허(ruin) 중독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영원할 것처럼 지었던 도시와 신전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흙먼지로 돌아갔다.

아그리젠토에서 가장 좋았던 풍경은 간난 아기를 신전 앞 바위에 앉히고 사진을 찍는 젊은 부부였다. 너무나 정겹고 보기 좋았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문장, 레닌이 좋아했다는 그 문장을 패러디하자면, 모든 신전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갓난아기의 싱그런 웃음이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현재 북유럽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