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국권이 없어 존엄을 짓밟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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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국권이 없어 존엄을 짓밟혔지만
  • 이재표 편집국장
  • 승인 2023.07.1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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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표 칼럼 [외딴 우물]

진짜 끌려간 게 맞느냐, 어쩌면 속아서 갔는지도 모른다, 혹시 돈을 벌러 제 발로 간 건 아니냐고 따지지 마라. 반도에서도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한다고 소학교국민학교로 바꾸던 시절이었다.

1944, 양금덕은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우수 학생 열 명만 뽑아 일본에서 돈도 벌게 해주고 중학교도 보내준다고 했다. 반장이었던 금덕이 손을 들었다. 부모님은 막내딸이 가는 길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교장은 선발된 딸을 보내지 않으면 경찰서에 보내겠다고 윽박질렀다. 금덕은 아버지 도장을 몰래 담임에게 주었다.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야나가와 가네코(梁川金子)’가 되어 비행기를 닦고 페인트를 칠했다. 노동이 고되고 유독물질에도 노출돼 오른쪽 어깨와 눈, 후각이 손상됐다. 일한 임금도 떼였다. 지진과 폭격으로 친구들이 눈앞에서 죽어갔다.

1년 뒤 해방이 되어 다시 양금덕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데 일본에 다녀온 여자라는 손가락질이 열네 살 소녀를 옭아맸다. 훗날 남편도 그랬다. 새살림을 차렸던 남편은 10년 만에 병들어 세상을 떴다. 남편이 나가서 얻은 셋까지 자녀는 모두 여섯이 됐다. 아흔셋이 될 때까지 어떻게 풍파를 헤쳐왔는지는 굳이 쓰지 않겠다.

한 사람이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존엄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만 정리해 보겠다. 1992년 광주·전남 피해자 127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천인소송에 동참했다. 1994년 관부재판(시모노세키 재판), 1999년 나고야 지방법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수십 차례 일본을 오가며 싸웠다. 하지만 일본 최고법원은 2008년 자국에서의 모든 소송을 기각했다.

가해자 일본은 틈만 나면 피해자들의 존엄을 짓밟았다. 2009년에는 후생노동성이 후생연금 탈퇴 수당 99엔을 지급했다. 환율을 고려치 않고 1000원도 되지 않는 돈을 입금한 것이다. 양 할머니는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후생노동성 앞에 100엔을 던지고 왔다.

2012년부터 한국 법정에서 미쓰비시 손해배상 관련 소송이 시작됐다. 2018년 대법원에서 압류 자산의 강제매각이 확정됐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배상은커녕 여전히 임금을 떼먹고, 일언반구 말이 없다. 대신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으로 한국을 압박했다. 우리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폐기로 맞섰다. 지난 정부까지 그랬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면서 지소미아를 복구하더니 미쓰비시가 피해자들에게 줄 배상금을 ‘3가 대신 갚겠다고 했다. 여기서 3자란 애먼 한국기업들이다. 포스코가 먼저 40억 원을 내기로 했다. 오로지 존엄을 찾는 게 목적인 양금덕 할머니 등은 일본이 주는 돈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법원에 공탁을 시도했다. 법원에 돈 맡겨놓을 테니 찾아가란 얘기다. 광주법원도, 수원법원도 피해자나 유족이 원치 않는 공탁금은 맡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굴하지 않고 이의신청을 냈다. 법원은 또 거절했다. 그러자 재판도 불사하겠단다.

그때는 국권이 없어서 국민의 존엄이 짓밟혔다. 지금은 국권을 회복한 지 어언 78, 세계 10대 강국이라고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되려 국민의 존엄을 짓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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