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바로크 기행 ‘라구사’
상태바
시칠리아 바로크 기행 ‘라구사’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07.14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지러진 진주처럼 우연과 자유분방한 건축
라구사 대성당, 성 조르지오 카테드랄. 성당 입구 철문 위에 성 조르지오의 조각이 있다. 사진=정연일
라구사 대성당, 성 조르지오 카테드랄. 성당 입구 철문 위에 성 조르지오의 조각이 있다. 사진=정연일

정연일의 지중해 섬기행⑩

유럽 여행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크(Baroque). 프랑스어이지만, 이지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pérola barroca’ 에서 나왔다. 주로 성당이나 궁전에 대한 건축용어로 쓰이지만, 바로크 시대라고 하는 것이 적확하다. 건축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복식 등 전 유럽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대략 시기는 17세기에서 18세기 르네상스 이후이다. 바로크 이전의 건축양식은 고딕과 르네상스였고, 이후는 로코코로 이어진다. 이지러진 진주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바로크 시대의 특징은 한 마디로 과장, 기괴함, 자유분방함이었다. 르네상스 스타일의 균형과 조화에서 벗어나 우연과 자유분방함을 강조했다.

바로크 시대 건축물의 특징은 화려한 외부장식과 완벽한 좌우 대칭이다. 비단 건축물뿐만 아니라 화려한 장식음과 파격적인 효과의 바로크 음악, 대각선 구도와 강렬한 명암과 눈속임 기법의 바로크 미술, 아래가 매우 넓고 풍성한 치마로 상징되는 바로크 복식 등이 있다. 1980년대 한국의 가구 업체에서도 브랜드 네이밍으로 쓰였던 바로크 가구는 책상이나 의자 다리도 화려하게 장식했다.


바로크 트라이앵글 중 하나

 

기사의 카페 Caffè dei Cavalieri, 1850 년에 지어진 귀족의 사교 클럽 장소. 대성당 앞에 위치.
기사의 카페 Caffè dei Cavalieri, 1850 년에 지어진 귀족의 사교 클럽 장소. 대성당 앞에 위치. 사진=정연일

시칠리아 섬 동남부에는 바로크 건축물로 유명한 도시 세 곳이 있다, 라구사, 모디카, 그리고 노토이다. 세 도시를 이으면 삼각형처럼 보여서 바로크 트라이앵글이라고도 한다. 세 곳의 도시가 동남부에 몰려있는 이유는 1693년 시칠리아를 강타한 대지진 때문이다. 무너진 도시를 재건한 시기가 바로크 시기였기에 원형이 잘 보존된 바로크 시대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 신전으로 유명한 아그리젠토를 떠나 시칠리아의 제2의 도시인 카타니아로 가는 길에 세 곳의 도시를 들르며 바로크 건축 기행을 시작한다. 세 도시 모두 역사는 시칠리아섬의 역사처럼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가나, 세 도시를 찾는 이유는 바로크 건축의 정수를 보기 위해서 이니 고대의 역사는 잠깐 잊어도 좋다. 세 곳의 도시는 비슷하면서도 제 각각 조금씩 다른 매력이 있다.

라구사(Ragusa)라는 이름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옛 이름이기도 하지만 시칠리아의 라구사와 크로아티아의 라구사는 연관이 없다. 라구사는 긴 협곡으로 도시가 나눠진다. 애초에 도시가 있었던 곳이 17세기의 대지진으로 무너지며 협곡의 반대편으로 이전하고, 무너진 도시는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했다. 이전한 도시가 협곡 건너편 높은 곳에 있고 애초의 도시는 조금 낮은 곳에 있어, 각각 라구사 슈페리어(높은 곳)와 라구사 인페리어 또는 이블라(낮은 곳)으로 부른다.

라구사 수페리어(윗동네)에서 내려다 본 이블라(아랫동네) 야경.
라구사 수페리어(윗동네)에서 내려다 본 이블라(아랫동네) 야경. 사진=정연일

대부분 호텔과 숙소는 슈페리어 지역에 있어, 라구사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푼 뒤 협곡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천천히 도보로 둘러보기 적당하다. 슈페리어에서 시작해 이블라 지역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숙소로 복귀하려면 오르막 내리막길을 반복해야 하지만, 보통의 건강과 체력이 있으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소도시 여행은 대성당이 기준


이탈리아의 오래된 소도시를 여행할 때는 항상 대성당(Duomo)의 위치부터 파악하는 것이 좋다. 두오모와 두오모 앞 광장(Piazza)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통 도보 여행의 시작과 끝을 두오모로 잡는 게 도시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기도 쉽고, 대성당은 구시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길을 찾기도 쉽다. 길을 잃으면 현지인을 붙잡고 두오모!”라고 외치면 모두 친절하게 길이나 방향을 알려준다. 두오모는 그들의 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라구사 구시가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크 양식의 건물과 도시가 눈앞에 펼쳐지며 마치 바로크 시대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유럽과 이탈리아의 여러 고도(Old city)처럼, 라구사 이블라도 그리 크지 않다. 라구사 이블라는 언덕 위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데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1km 내외이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표지판과 성당 꼭대기를 눈으로 좇으며, 먼저 대성당으로 향한다. 대성당 앞 광장에 서니 화려한 장식과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바로크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탈리아에서 두오모는 곧 대성당을 뜻하지만, 고유 명사라기보다 일반 명사에 가깝다. 두오모는 집(house)을 뜻하는 라틴어(Domus)에서 나왔다. 사람의 집이 아니라 신의 집(Domus Dei)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 여러 언어에서 성당 또는 교회를 뜻하는 단어로 변형되어 쓰인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어의 돔(Dom)이다. 성당이나 교회를 뜻하는 독일어 ‘Kirche’를 붙여 ‘Dom kirche’라고도 한다.

라구사 수페리어(윗동네)에서 내려다 본 이블라(아랫동네) 일출 풍경. 사진=정성후
라구사 수페리어(윗동네)에서 내려다 본 이블라(아랫동네) 일출 풍경. 사진=정성후

두오모는 보통 그 지역의 주교좌 성당 ‘Catheral’ 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러 역사적 정치적 이유 때문에 가끔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두오모 뒤에 보통 해당 지역의 수호성자의 이름을 붙이거나 지역의 이름을 붙인다. 라구사 두오모의 정식명칭은 성 조르지오 대성당이다. 이탈리아어 조르지오(Georgio)는 영어의 조지(George)이다.

유럽 기독교 문명, 특히 가톨릭 지역을 여행할 때에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와 가톨릭의 성자와 성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는 게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성 조지(George)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각자의 언어로 호칭 되지만 모두 같은 인물이다. 로마제국 군인 출신의 초기 기독교 순교자 였다라고 전해진다.


무장한 기사의 상징 조르지오


유럽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투구와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말을 탄 기사가 용과 싸우는 모습의 조각이나 그림의 주인공이 모두 성 조지다. 상징은 하얀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이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그리스 동방 정교 및 성공회와 개신교인 루터교에서도 성인으로 모신다.

군인 출신이었기에 군사적 승리와 수호를 뜻해 유럽의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서 성 조지를 수호 성자로 삼았기에 역시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월드컵 때면 영국이 아니라 각각 출전하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깃발이나, 코카서스 산맥의 기독교 국가 조지아 모두 성 조지와 연관이 있다.

유럽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 조지 상(스웨덴 스톡홀름 대성당)
유럽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 조지 상(스웨덴 스톡홀름 대성당) 사진=정연일

성 조르지오 대성당(라구사 두오모)에서 이블라 정원으로 가는 길의 양쪽으로, 좁고 고풍스러운 골목과 골목 구석구석에 들어서 있는 작고 아름다운 가게와 카페와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처럼 라구사에도 대성당 외에도 크고 작은 교회가 많다. 두오모처럼 역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두오모와 외관은 비슷하지만 크기는 조금 작은 성 요셉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두오모는 문을 닫아 내부 입장하지 못했는데, 요셉 성당은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 보니 노년의 수녀님들이 저녁 미사를 보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 때 5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대학에 들어가며 발길을 끊은 지 오래이고 가톨릭 성당은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지만, 유럽 여행 도중 성당이 나오면 들어가서 촛불을 붙이고 의자에 앉아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나오는 편이다.

종교나 신앙과 상관없이 마음이 잠깐 평온해지기도 하거니와, 제아무리 편하고 안전한 여행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일정 부분의 위험 요소가 있기에 여행의 안녕을 빌어본다.

이탈리아는 국교가 없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가톨릭이 주류인 국가이지만 미사 시간에 맞춰 성당에 가보면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와 수녀 외에 참석자는 거의 노인 특히 여성 노인이다. 젊은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흔히 이탈리아 사람은 평생에 세 번은 성당에 간다는 농담이 있다. 태어났을 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마지막은 본인 장례식이다.

대성당. 사진=픽사베이
대성당. 사진=픽사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비교적 젊은 사람, 특히 여성을 본다. 성 요셉 성당에도 미사를 집전하는 수녀님들 외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서너 명이 전부다. 그중에 한 명, 미사포를 쓴 젊은 여성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무슨 사연일까, 어떤 삶의 고통과 무게 때문일까. 그런 풍경을 접할 때마다, 신의 존재 유뮤와 상관없이 여전히 종교는 유효하고 필요한 것일까 하는 질문이 든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진 길을 따라 다시 숙소가 있는 라구사 슈페리어로 돌아오는 길에는 비수기이긴 하지만 사람이 없다.

불이 꺼진 많은 건물에 이탈리아어로 매매 또는 임대 간판이 붙어있다.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태어난 지역을 떠나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한 이탈리아도, 일자리를 찾아 잘사는 북부로 대도시로 젊은이들이 떠나며 소멸의 위기에 처한 곳이 많다. 라구사는 비교적 유명한 관광도시인데도 이렇다. 한국의 지방소멸이 겹친다. 라구사의 밤이 깊어간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현재 북유럽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