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들려주는 들판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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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들려주는 들판의 인생
  • 장인수 시인, 국어교사
  • 승인 2023.07.25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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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총량으로 내리는 빗소리

밤새 굵은 비가 퍼부었다. 저러다가 빗방울이 킹콩보다도 커져서 세상을 다 삼켜버릴 것 같다. 공룡 구름은 감각의 총량을 총동원해서 땅바닥과 땅속까지 스며서 이것저것 헤집고 있다.

논마다 물을 다 뺐다. 7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40여 일 동안 논에는 물을 대지 않는다. 오히려 논바닥이 바싹 말라 쩍쩍 갈라지도록 내버려둔다. 그래야 뿌리가 물을 찾아 논바닥 깊이 뻗으면서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삭이 통통 여물어 머리통이 무거워질 때 강력한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기 때문이다.

장마가 오면 정신이 없다. 아버지와 엄마는 빗방울이 온 세상에 스며드는 속도를 살핀다. 빗방울이 동부 꽃, 참깨 밭고랑, 참외 꽃잎에 떨어지는 몸짓을 살핀다. 비가 내리면 들판의 생명들은 맹렬하게 반응한다.

특히 고추밭을 더 유심히 살핀다. 밭고랑의 흙탕물이 튕겨 고추에 묻으면 땅속에 있던 탄저균이 고추에 번식하면서 순식간에 고추밭은 탄저균의 아비규환이 된다. 그래서 장마가 소강상태가 되면 탄저병 확산 방지를 위해 즉각 약을 뿌려야 한다. 또한 물이 잘 빠지도록 삽으로 고랑의 물길을 잡아야 한다. 물길이 막히면 농작물의 뿌리가 녹아서 곯는다.

비가 오면 들쥐와 두더지와 드렁허리가 파놓은 구멍으로 물이 새면서 논둑 밭둑이 무너지고 유실된다. 들짐승이 파놓은 구멍을 막고, 막힌 곳은 뚫어야 한다.

일을 하다가 빗물 섞인 막걸리를 몇 잔 마신다. 술은 비와 같고 비는 술과 같아라. 하늘에서 땅으로 주천(酒川)이 흐른다. 농부는 비오는 날에 농치거나 한가할 수 없다. 더 바쁜 날이다.

장마철에 들깨를 심는다. 7월 초중순쯤이다. 감자와 마늘을 캐낸 밭에 메주콩과 서리태와 들깨를 심는다. 들깨는 비를 맞으면서 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7월 초중순 비 오는 날 우비를 쓰고 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 농부가 있다면 그는 필경 들깨 모를 심고 있는 것이리라.

거센 빗방울이 아버지의 굽어진 허리 위를 두들긴다. 멀리서 보면 그 느낌이 예술적이다. ‘열 번 물을 주는 것보다 한번 흠뻑 내리는 비가 낫다는 말을 증명하는 듯 비를 흠뻑 맞으며 심은 들깨 모는 금방 쑥쑥 키가 자랄 것이다. 비는 질소, 칼슘, 마그네슘을 다량으로 함유한 영양제다. 비를 맞으면 작물이 몰라보게 부쩍 커버린다.


하늘이 땅으로 흐르는 들판


 

이번 주에는 청주 성모병원에 들렸다가 시골에 갔다. 아버지는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고, 엄마도 간호를 위해 병원에 있다.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시골집. 기척도 없는 빈집의 지붕을 타고 일렬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박음질, 시침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아버지의 가슴을 수술하고 봉합한 수술 봉합선처럼 비는 내린다.

헛간 처마의 전깃줄에 제비가 앉아 있었다. 헛간에는 흰 진돗개 두부가 나를 보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격하게 반긴다. 섬돌의 신발이 비를 맞고 있다. 나는 마당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헛간으로 가서 개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 혼자서 저녁밥을 해서 마루에 개다리소반을 놓고 외로운 혼밥을 먹었다.

빗소리는 어떤 흡입력이 있는 것 같다. 최면제처럼 물소리에 녹아버린 시간이 흐르고 인생이 흐른다. 지금 저 장마 전선은 무려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긴 하늘의 강을 형성하고 있단다. 멀리 인도의 벵갈만에서 시작하여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중국, 대만, 한국, 일본, 북태평양까지 이어지며 흐르는 거대한 구름의 강이란다.

한 달 넘게 한반도 상공을 오르내리며 비를 뿌리는 구름 띠와 하늘의 장강(長江). 볍씨만한 빗방울, 대파씨만한 빗방울, 수수씨만한 빗방울. 싀싀식싀스식 낫 소리를 내기도 하고, 푸슈슈슈슛 하늘의 강이 내려와 진천 미호강으로 흐른다. 내 눈동자는 깊숙이 빗물이 흐르는 미호강 지류가 된다.

빗소리는 극단적 폭우의 불안한 징조다. (원래는 빗소리는 냄새의 세계다라는 글 꼭지였는데 급히 삭제했다. 비 피해가 심각해서 문장을 통째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빗방울에는 비애(悲哀), 비문, 비의(秘意), 비린내, 비련를 불러온다. 폭우로 인해 농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710일부터 16일까지 내린 비로 인해 농작물 침수, 유실, 낙과, 폐사 등 9309.5(헥타르·1=1, 28000만 평)의 피해가 접수됐다고 한다. 사상 유례없는 폭우 피해다.

우리 마을인 초평면 용산리 용대마을은 보강천과 미호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우리 집은 논둑 10여 미터가 논으로 쓸려 들어가 벼 두 줄 정도가 파묻혔고, 천이백 포기 고추 중에서 3분의 1 정도가 쓰러졌다. 하지만 달천강 주변과 미호강 오송 주변은 큰 재난을 겪었다. 제방 붕괴과 도로 침수로 인해 피해가 막대하다.

폭우-폭염 동시에, 극단적인 이상기후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기상 이변과 폭우가 심상치 않다. 학자들은 장마철이 아니라 우기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집중호우대신에 극단적 폭우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날씨는 더 빈번해질 것이란다.

 

정치와 경제 상황도, 좌우 이념 논쟁도, 날씨마저도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 세상이 왜 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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