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은 정치·법률·산술 모두 뛰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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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은 정치·법률·산술 모두 뛰어나”
  • 박익규 전문기자
  • 승인 2023.07.2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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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이 극찬한 독립운동가이자 동서양 아우른 통섭의 학자
신문물 받아들이기 위해 영어‧일본어에다 러시아어도 ‘능통’
망명‧순국으로 희미한 자취…사상‧철학 연구는 남겨진 과제

헤이그 특사 보재 이상설③

한 사나이가 있다. 1870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태어난 보재 이상설 선생. 후세는 그를 독립운동가로 부른다. 그렇다. 이상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이론적 방향을 세우고 앞장서 실행한 선구자였다.

여기에다 그는 독립운동 못지않게 대학자로서 동서양 학문에 두루 밝은 천재 중의 천재로 후대의 평을 받고 있다. 그의 학문의 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관복을 입은 이상설(오른쪽). 왼쪽은 동생 이상익. 사진=독립기념관
관복을 입은 이상설(오른쪽). 왼쪽은 동생 이상익. 사진=독립기념관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絶輪)하고 조예(造詣)가 심히 깊어 동서 학문을 거의 다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연구하므로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법률·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대한매일신보 19051124, 베델의 이상설 상소 논평>

이상설은 신구학문을 겸수했다. 학문 분야도 광범해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학은 물론 신학문에 있어서 정치·법률·경제·사회·수학·과학·철학·종교 등 모든 분야에 일가를 이뤘다. 이러한 학문의 수학을 위해 일찍부터 영어·일어 등의 외국어도 배우고 뒷날 러시아어까지 익혔다.

이처럼 불굴정진하고 지행합일한 선생의 공부가 훗날 대한독립의 기초를 놓은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그러하듯 학문에 관한 연구 또한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어려서부터 재동·신동 소리를 듣던 이상설은 스무 살을 넘으면서 이미 유학의 큰 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구한말 문신 이건창이 보낸 편지에는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학자로 칭송하고 있다.

이상설의 호패. 출생연도와 과거 급제 연도가 새겨져 있다. 사진=독립기념관
이상설의 호패. 출생연도와 과거 급제 연도가 새겨져 있다. 사진=독립기념관

진실로 이상설의 뒷날 대성하고 창무한 것을 누가 막지 않는다면 이는 율곡의 도가 행함이요, 그것은 나라의 부강이 될 것이요. 백성의 복지가 될 것이요, 선비의 영화가 될 것이다. 어찌 작게 이상설 혼자만의 행복이라 하리요.”

참으로 당대에 이상설 선생은 국가의 기둥이요, 백성들에겐 어진 관료로 큰 역할을 기대하기 충분했다. 이건창 선생의 편지글대로 누가 막지 않는다면말이다. 그러나 이상설은 그리하지 못했다.

25세에 과거에 급제하기 전 이상설은 시국과 사회의 큰 전환을 살피고 곧 신학문과 근대사상을 거의 자습으로 수학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이자 고종의 고문 역할을 한 헐버트 박사와 정치적으로 교분이 두터워 그로부터 영어·불어 등의 외국어와 신학문의 지도를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헐버트 박사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국의 국권 수호와 항일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인물로 뒷날 이상설의 헤이그 밀사 결행에 큰 밑받침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상설은 외국의 신간 서적을 구해 새로운 정치사상을 수용했다. 이상설은 외국의 서적을 통하여 신사조를 연구하는 한편 개화 혁신을 통하여 구국의 경륜을 이룰 수 있는 신정강(新政綱)을 준비하고 그것을 실천할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상설이 신학문을 수학할 때 쓴 것으로, 지금 전해지고 있는 국제법인 십간섭을 비롯해 수학인 수리’, 물리·화학·식물학, 계약법, 정치 등의 번역서 등의 자료는 그의 신학문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상설의 신학문은 일반 상식으로 쉽게 믿을 수 없으리만큼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고 특히 수학과 법률에 있어서는 대가로 지칭되었다. 특히 수학에 있어서는 이상설이 제일인자로 칭송되고 또한 가장 먼저 학계에 수학을 수용한 인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헤이그 특사 세 사람. 왼쪽부터 이상설, 이준, 이위종. 사진=독립기념관
헤이그 특사 세 사람. 왼쪽부터 이상설, 이준, 이위종. 사진=독립기념관

이상설은 당시 통용되던 중등학교 수학 교과서를 저술하였고, 1907년 간도에 그가 세운 서전서숙에서 직접 학생들에게 교수하기도 했다. 그가 해외로 망명한 후에 그의 아우 이상익의 저술이 통용됐던 사실만 봐도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설의 학문에 대한 칭송은 위당 정인보와 백암 박은식을 비롯해 매당 장석영, 한계 이승희, 농성 조원구 등도 비슷한 평을 남겼다. 1945년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으로 환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성제 이시영은 이상설의 수학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 보재 학우는 자신과 백형인 우당 이회영을 비롯하여 남촌의 3재동으로 일컬었던 이범세, 서만순과 미남이요 주옥같은 글씨로써 명필로 이름을 남긴 조한평, 한학의 석학인 여구형, 아주 뛰어난 재로초 칭송되던 여조현 등이 죽마고우였고, 송거 이희종과는 결의형제의 맹약까지 한 사이였다.

또한 나중에 대부분 정부에서 중추적인 일들을 하게 된 이들 학우 중에서도 보재는 학우 간에서 선생 격이었기에 그 문하생으로 민형식 등 일고여덟 명이나 되었으니 그와 동문 수학자는 17~18명이나 되었다. 보재가 16세 되던 해인 1885년 봄부터는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을 써 붙이고 한문·수학·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때 보재의 총명 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는 같은 학우들이 경탄함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끈질긴 탐구열과 비상한 기억력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었다. 보재는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하였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관한 어떤 문제를 반나절이나 풀려다가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 속에서 풀었다고 깨어서 기뻐한 일이 있다.

또한 학우들이 다 취침 후에도 혼자 자지 않고 새벽 두세 시까지 글을 읽고도 아침에는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공부하였다. 기억력이 얼마나 비상하였든지 자면서도 학우들이 한 이야기를 깨어서 역력히 기억하였다. 그는 식사 후에는 반드시 20분 정도 자는 습관도 있었다.”

위당 정인보는 이상설을 추모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문장은 경교(鯨鮫·고래와 상어)를 넘어뜨릴 만하고, 성리는 근굴을 뚫었다. 깊은 생각은 역학과 수학에 궁달하였고, 정치와 법률에 정통하였다. 의학은 모르는 것이 없었고 역사와 지리는 더욱 연구가 깊었다. 외국어 정도는 오히려 얕은 데 속하여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하였고 러시아 학문도 통하여 톨스토이와도 사귀었다.”

이처럼 지인과 후대의 논찬에서 보듯 이상설은 천재 중의 천재로 평을 받고 있다. 허나 선생의 다양한 학문적 깊이나 사상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상태다. 임종 유언대로 중요한 자료들이 대부분 없어졌고 그나마 유족들이 해방 이후 모은 자료가 전부이나 대부분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청년 시절 신·구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박식하고 뛰어난 대학자이다. 그는 초기 독립운동의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당시 일제 기록에도 선생을 주뇌(主腦), 대뇌(大腦)로 기술하고 있다.

선생은 1917년 순국 전까지 우리 독립운동의 뛰어난 전략가로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국난의 시기에 국가의 지도자는 확고한 자기 철학과 사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독립운동 못지않게 선생의 철학이나 사상에 관한 연구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서양수학 이해한 천재 중의 천재

1896년 성균관 교과과정에 수학 필수과목 지정

1900년 우리말 첫 수학 교과서 산술신서편찬

 

이상설이 쓴 근대수학 첫 번째 교과서인 산술신서. 사진=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이상설이 쓴 근대수학 첫 번째 교과서인 산술신서. 사진=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선생은 19세기말 조선 근대수학의 첫 번째 교과서 편저자이자 수학 교사이다. 대유학자이면서도 선구적으로 외국어와 서양과학 특히 근대 서양수학을 이해한 천재 중의 천재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에는 특히 수학에 있어서는 이상설이 제일인자로 칭송되고 또한 가장 먼저 학계에 수학을 수용한 인물인 것 같다. 그 무렵에 (일본에서 지형측량을 배우고 돌아온) 남순희가 수학으로는 이름이 높았으나 고등수학에 있어서는 이상설이 독보적인 존재로서 이상설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선생의 나이 17,18세인 1886~1887년 사이에 붓으로 수리(數理)라는 책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일본, 서양의 수학책을 번역한 최초의 우리말 수학책이다. 또한 성균관장으로 임명된 이상설은 고종의 1895년 교육조서를 받들어 1896년 국립 성균관의 교과과정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서양수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1900년에는 학부 편집국장 이규환의 부탁으로 한성사범학교 수학 교재인 우리말 수학책 산술신서를 직접 편찬했다. 정부가 편찬한 이 책은 최초의 수학 교과서가 되었다. 이후 우리말로 쓰인 많은 수학책이 1910년 한일병탄까지 출판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수학 교육이 시작된다.

선생의 동생 이상익도 1909년 수학 교과서인 근세산술을 저술하기도 했다. 근세산술은 다른 수학책보다 많은 문제 연습을 통한 실질적인 수학 실력 배양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통해 대한제국의 모든 사립학교 교육을 공공연하게 통제하기 시작해 우리말로 쓰인 모든 수학책을 수거하고 폐기해 1945년까지 우리말 수학책은 단 하나도 발간되지 않았다. 헤이그 사행 이후 조선통감부가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산술신서도 거의 금서 취급을 받다가 1910년 이후 수거되어 불태워진다.

나아가 일제는 조선총독부령을 근거로 조선조 500년간 고급 관료와 학자를 배출해온 한반도 유일의 고등교육기관 성균관의 인재 양성 기능마저 정지시킨다. 이 시기는 근대수학과 성균관의 암흑기였다.

설한국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 역사에서 그의 진정한 선구자적 역할은 근대 수학교육의 시작에 있다이상설은 근대수학을 깊이 이해한 선각자이며 특히 한국의 정교 고등 교육과정에 최초로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한 인물로 근대수학 교과서를 최초로 발간한 탁월한 수학교육자였다고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박익규

음성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살아온 충북 토박이다. 중부매일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문화교육체육팀에서 20여 년간 기자, 부국장으로 일했다. 충북도지사 연설기록담당관, 충북인재양성재단 사무국장으로 6년 재임했다. 자신의 삶과 사회 발전을 두루 고민하며 조화롭게 제2의 인생을 사는 중장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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