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장외외교, 세계언론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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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장외외교, 세계언론 주목했다
  • 헤이그=이재표 기자
  • 승인 2023.08.1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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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이위종 영어‧프랑스어 능통, 국제법‧세계정세 해박
만국평화회의보 윌리엄 스테드 편집장…1면에 전면기사
7월 16일 만평 회의장에서 문전박대당하는 예수에 빗대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의 드 리데르잘(기사들의 전당이라는 뜻). 네덜란드의 정치 1번지인 이 곳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라 측면만 볼 수 있다. 사진=이재표 기자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의 드 리데르잘(기사들의 전당이라는 뜻). 네덜란드의 정치 1번지인 이 곳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라 측면만 볼 수 있다. 사진=이재표 기자

만국평화회의보(Courier de la Conference de ia Paix)’의 윌리엄 티 스테드(William T. Stead) 편집장이 앳된 동양 청년에게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죠?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십니까?” 영어와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이 청년은 아마도 영어로 대답했을 것이다. 윌리엄 티 스테드가 영국 기자였으니 말이다.

청년은 단호히 답했다. “나는 제단(祭壇)이 헤이그에 있다고 말하는 법과 정의, 평화의 신을 혹시라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스무 살의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해박한 국제법‧세계정세에 대한 지식으로 크게 활약했다. 사진=이준평화기념관 촬영
스무 살의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해박한 국제법‧세계정세에 대한 지식으로 크게 활약했다. 사진=이준평화기념관 촬영

스무 살 청년의 이름은 이위종, 그가 떠나온 먼 나라는 대한제국이었다. 이위종은 고종 황제가 보낸 특사였다. 주러시아 공사관 이범진의 아들이자 참사관이었던 이위종(20)은 평리원 검사 이준(48), 의정부 전 참찬 이상설(37)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덴 하그)에 왔다. 고종은 615~1018,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의 눈을 피해 이들에게 밀명을 내렸다.

422일쯤 당시 국제역(國除驛)이었던 경성역에서 이준이 먼저 출발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났다. 521, 두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위종은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했다. 3인을 태운 기차는 독일 베를린과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625일쯤 헤이그에 도착했다.

개막하고 열흘쯤 지난 뒤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특사들은 회의장 입장조차 거부당했다. 초청장이 없다는 게 공식 이유였지만, 당시 참석자들은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1905년 초청국 명단엔 꼬레 있어


만국평화회의를 제안한 러시아가 2년 전인 1905925, 마흔일곱 개 초청국에 보낸 서한에는 열두 번째에 분명히 ‘Coree(꼬레, Korea)’가 있다. 그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사단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627일에는 헤이그에서의 한국독립호소문을 프랑스어로 발행해 45개국 대표 239명에게 보냈다. 을사늑약은 고종황제의 승인 없이 일본이 무장 병력을 앞세워 법률을 무시한 채 체결돼 무효라는 내용이었다. 만국평화회의보를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인 각국의 공동기자단은 특사단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인 듯하다.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들을 집중 조명한 윌리엄 티 스테드기자. 그는 영국의 저명한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로 만국평화회의보의 편집장을 맡았다.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들을 집중 조명한 윌리엄 티 스테드기자. 그는 영국의 저명한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로 만국평화회의보의 편집장을 맡았다.

윌리엄 티 스테드와 이위종의 인터뷰는 75, 만국평화회의보 1면에 전면 기사로 실렸다. 스테드가 그들은 전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조약들을 체결할 것이라고 말하자 이위종은 조약들이요?”라며 비웃었다. 이어 이위종은 조약들은 위반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스테드의 인터뷰가 생생한 것은 청년의 당돌한(?) 행동과 말투까지 지문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소 어린 웃음과 함께), (말을 끊으며), (여한 없이) 등이다. 스테드가 평화를 보장하는 조약을 예로 들려 하자, 이위종은 말을 끊으며 여기 이 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기사를 읽으면 이위종이 국제법과 세계정세 등에도 매우 해박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위종은 스테드가 을사늑약에 대해 알고 있다면서도 하지만이라고 반론하려 하자 하지만이라뇨?”라며 강력하게 되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위종은 결국 가증스럽게 당한 치욕은 회복할 길이 없고, 정당해야 할 조약이 불법적으로 위반된 사실에 대한 한 민족의 항의가 무시되어질 수 있으며, 한 나라의 독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보장 여부와 관계없이 침탈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기자회견장엔 150명 몰려


이위종은 기자가 변명하려고 하자 싫습니다. 나에게 말하지 마십시오라며 말을 막아선다. 그리고 당신은 소위 말하는 평화주의자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에게서 당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찾아보십시오. 대한제국은 무장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들 평화론자들이 전도하는 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됐습니까?”라며 열변을 토한다. 이위종은 우리나라를 극동의 스위스처럼 만들 수 있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한다.

그렇다면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 축제 때의 해골이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스테드 기자는 인터뷰 첫머리에서 이집트인들에게는 잔칫상에 해골 하나를 놓아두는 관습이 있다.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허무를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평화의 잔치를 자처했던 만국평화회의가 강대국들의 잔치로 전락한 것을 비꼰 것이다.

1907년 7월 16일 만평은 헤이그 특사를 회의장서 문전박대당하는 ‘예수’에 빗댔다. 원래 그림은 칼라였다. 사진=이준평화기념관 촬영
1907년 7월 16일 만평은 헤이그 특사를 회의장서 문전박대당하는 ‘예수’에 빗댔다. 원래 그림은 칼라였다. 사진=이준평화기념관 촬영

이위종의 인터뷰가 언론에 공개되자 각국의 기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고 사흘 뒤인 78, 스테드 기자의 주선으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는 무려 150명이 몰렸다. 이위종은 이 자리에서 프랑스어로 연설했다.

1907714일 오후 7시 이준이 숙소인 호텔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716일자 만국평화회의보 1면에는 삽화가 루이스 라이마컬스의 만평이 실린다. “평화라는 문패를 걸고 있는 그 모임에 진정한 평화는 빠져있군요라는 설명이 붙은 이 만평은 회의장 앞에서 문전박대당하고 돌아서 나오는 예수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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