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인, 로봇 지휘자 등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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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인, 로봇 지휘자 등장이요
  • 이숙정 전문기자
  • 승인 2023.10.1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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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 디지털화-데이터 변환-동작 최적화한 ‘마에스트로’
1만5000여 편 학습하고 작법 익히니…AI도 詩가 ‘술술’
불안한 공존, 미국선 배우 노조와 작가조합 파업사태도

오래 보아야 예쁘다. 당신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은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단한 시적 표현도, 화려한 비유도 없는 평범하고 간결한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이 시는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그건 시의 힘이었고 그 시를 쓴 시인의 힘이었다.

시는 현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통찰력이 응축된 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감동을 주는 시의 핵심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흰머리를 흩날리며 검은 연미복을 입고 등장한 클래식 음악의 전설 카라얀이 지휘봉을 들어 올린다. 사람들은 숨죽여 지휘자의 지휘봉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이윽고 지휘자의 지휘봉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음 사이를 유려하게 날아다닌다.

관객은 음악이 단순히 음의 조합이 아니라 연주자와 지휘자의 교감, 오랜 경험에서 나온 곡의 해석 능력, 이 모든 것이 더해지는 유무형의 예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로봇 지휘자 에버6. 사진 제공=국립극장
로봇 지휘자 에버6. 사진 제공=국립극장

예술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것에는 아직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이 예술의 영역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이미 2008년에 일본 혼다사가 만든 로봇 지휘자 아시모(Asimo)가 등장했다.

AI 화가 오비어스(Obvious)가 그린 초상화 에드몬드 벨라미(Edmond de Belamy)201810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되었고, 미국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보다 약 6배 높은 가격에 낙찰되기도 했다. 201910월 아르메니아에서는 AI가 작곡한 클래식 음악을 100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실시간으로 연주하는 콘서트도 열렸다.

사실 이런 소식들은 현실감이 떨어진다. 우리에게는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서 만나는 안내 로봇 정도가 익숙하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과정을 눈으로 보게 된다면 어떨까? 인공지능이 쓴 시집이 판매대에 놓여 있는 것을 본다면? 음악회 지휘를 마친 로봇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또 어떨까?

최수열 예술감독과 로봇 지휘자 에버6가 지휘하고 있다. 사진 제공=국립극장
최수열 예술감독과 로봇 지휘자 에버6가 지휘하고 있다. 사진 제공=국립극장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던 일이 우리의 공연 무대에서도 현실이 됐다. 지난 6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 시리즈6’ <부재> 공연에 로봇 지휘자 에버6’가 등장했다. ‘에버6’2006년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개발한 감성 교감형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의 여섯 번째 시리즈다. 에버의 이름은 인류 최초의 여성인 이브(Eve)와 로봇의 머릿글자인 ‘R’을 합성해 만들어졌다.

에버는 그동안 전시장 안내, 동화 구연 등 다양한 할동을 해왔으며, 2009년 국립극장 무대에서는 왕기석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학생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13년이 흐른 2023년 에버6는 관현악단 지휘자로 돌아왔다. 물론 에버6에게 박자 같은 기본 정보를 입력한 뒤 인간 지휘자의 다양한 동작으로 모션 캡쳐(몸에 센서를 달아 인체 움직임을 디지털로 옮기는 작업) 하고 모션 리타겟팅(데이터 변환), 모션 최적화를 거쳐 정확한 박자를 찾아서 지휘하도록 했다.


아직까진 인간과 협업 형식


에버 6의 공연이 끝나고 약 한 달 뒤인 810, 이번에는 시를 쓰는 인공지능이 무대에 올랐다. 인공지능 시극 <파포스PAPHOS 2.0>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속 시아2021년 카카오브레인의 초거대 AI언어 모델 KoGPT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를 쓰는 인공지능이다. 시아는 13000여 편의 시를 학습하여 작법을 익혔고, 20232000여 편을 추가로 학습하여 <파포스 2.0>공연 무대에 올랐다.

인공지능 시극 파포스 2.0 포스터. 사진 제공=리멘원커
인공지능 시극 파포스 2.0 포스터. 사진 제공=리멘원커

인공지능과 안드로이드 로봇의 무대는 어땠을까? 이들은 모두 인간과 협업을 하는 형태로 무대에 등장했다. 에버6, 최수열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규칙적인 박자는 에버6가 맡고 즉흥성이나 구체적인 뉘앙스는 최수열 예술감독이 맡았다.

작곡가가 정해 놓은 큰 틀만 있고 악보에 정해진 선율과 리듬이 없는 곡을 연주자가 게임을 하듯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면 사람 지휘자가 연주자들과 교감하며 음악을 이어 나가고 로봇 지휘자는 곡이 연주되는 동안 일정한 속도와 박자의 패턴을 돕는 형식이다.

시아의 경우도 비슷한 과정을 보여준다. <파포스 2.0>의 김제민 연출가와 김태용 소설가가 시아뿐만 아니라 ChatGPT를 이용해 대본을 공동창작했다고 밝혔다. 관객들이 즉석에서 시어를 제시하면 인공지능 시아는 그것을 이용해 시를 생성해 낸다.

소설가와 연출가는 시아의 시 속 텍스트를 선별해 새롭게 대본을 써 내려간다. 텍스트는 연주자의 음악이 되고 공연자의 춤이 되고 노래가 되어 변주되고 확장된다. 시아의 존재는 배우들의 목소리와 몸을 통해서만 확인될 뿐이다.


낯설지만 경계할 정도 아냐


로봇이 정확하게 지휘를 하고 인공지능이 평범한 사람은 쓰기 힘들어하는 시를 짧은 시간 생성해 내는 광경을 현장에서 보고 나면 그제야 인공지능과 로봇의 존재가 현실로 다가온다. 다행히 이들의 등장이 우리에게 낯설기는 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경계심을 갖게 하지는 않는다.

공연 무대에서 만난 에버6와 시아가 인간에게 부족한 기능적인 면을 주로 담당하는 정도여서다. 시아가 아무리 수십 편의 시를 생성해도 시심(詩心)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고, 에버6가 아무리 정확한 박자를 계산해 내도 연주자의 감정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이 공연들은 에버6와 시아를 통해 인공지능도 로봇도 모든 면에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설 수는 없음을 역설로 보여줬다. 최대 효용을 끌어낼 역할 분담은 가능해도 역할 대체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최수열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은 지휘는 음악에 맞춰서 지휘봉을 흔드는 게 아니라 음악을 이끄는 일이라면서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역량을 강조했다.

AI가 생성한 실험실에 로봇 이미지 사진=픽사베이
AI가 생성한 실험실에 로봇 이미지 사진=픽사베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 <부재不在>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가능성을 찾아가는 무대라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 <파포스 2.0>을 연출한 김제민 연출은 인공지능으로 예술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공지능을 공동 창작자로 바라보고 새로운 창작 방식을 탐색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줄 것인가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이 공존하는 세상이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라면 예술의 어떤 역할을 분담할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되돌아온다.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은 대체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누가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주어야 할까?

2023714일 미국 배우 노조와 작가조합이 유례없는 동시 파업에 들어갔다. AI 사용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고 모든 AI로부터 문화예술계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일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될 가능성은 적다.

예술이 인간 고유의 영역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너무 늦은 질문이란 걱정도 된다. 에버6와 시아는 표면으로 드러난 아주 일부분에 불과할 수 있어서다.

●이숙정

공연전문 객원기자이자 비정규 에세이스트. 인터넷 매체 <민중의 소리>에 공연, 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오디오 플랫폼 <나디오> 오디오 작가로 활동 중이며, 화성시 문화재단 뉴스레터에 칼럼을 썼다. 포토 에세이집 <나도 처음이야, 중년>, 비정규직 노동자 취재기 <세상을 바꾸는 2%, 나는 비:정규직입니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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