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등바등 살지 않는 ‘지중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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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등바등 살지 않는 ‘지중해 스타일’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10.23 0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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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코미노섬에서 고조섬으로 가다
고조섬 항구 전경
고조섬 항구 전경

지중해 몰타를 가다③

블루 라군이 있는 코미노섬 일주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배를 타고 몰타의 제 2의 섬인 고조(Gozo)섬으로 간다. 몰타섬과 코미노섬, 고조섬 세 곳을 잇는 통합 보트 티켓을 구입하면 바다를 건너 섬과 섬 사이를 다니기에 편리하다. 코미노섬을 떠난 배는 20여 분 뒤에 고조섬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페리 터미널에서 내려서 다시 빅토리아로 간다. 고조섬을 찾은 이유이자 목적지이다.

빅토리아는 고조섬 중앙에 위치한 산정마을이다. 몰타는 섬이지만 높은 지대에는 이탈리아처럼 어김없이 성벽으로 둘러 쌓인 산정마을이 있다. 그리고 산정마을 아래쪽에 도시가 발달했다. 지중해 문명과 교역의 교차로에 위치했기에 외침이 잦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처럼 몰타도 숱한 문명이 스쳐 지나갔다.

빅토리아 위치
빅토리아 위치

빅토리아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먼저 대영제국 시절의 빅토리아 여왕이 떠오른다. 몰타의 고조섬에 있는 산정마을에 빅토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궁금해 구글에서 영문으로 검색해보니 역시나 몰타의 마지막 외세 지배자였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서 이름을 따왔다.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해 런던의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골든 주빌리(Golden Jubilee)가 열렸다. 골든 주빌리는 50주년 기념식이나 이벤트를 말한다. 이를 기념해 코미노 섬의 몰타어 지명 라바트(Rabat)가 영어 빅토리아(Victoria)로 바뀌었다.

역사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개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코미노 섬의 주교가 자발적으로 개명한 것이다. 강대한 외세가 지배할 때, 시키지도 않았지만 먼저 알아서 숙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상위 권력 계층이나 지식인들. 몰타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나타나는 슬픈 현상이다.


몰타어는 아랍계통 언어


노년층 몰타 사람들은 아직까지 빅토리아라는 이름보다는 라바트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라바트는 모로코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다. 어원은 아랍어로 성채 요새 도시를 뜻한다. 빅토리아 이전에 라바트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북아프리카의 아랍 이슬람 세력이 오래 지배했기 때문이다. 아랍의 지배는 키프로스 섬에서 구호 기사단의 도착 이후로 종식됐지만 아직도 몰타어에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코미노섬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보트 안
코미노섬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보트 안

몰타에 오면 영어가 아닌 낯선 언어가 자주 들린다. 특히 택시를 타면 기사들끼리 무전기로 대화를 나눌 때, 태어나서 처음 듣는 언어가 들려 같이 여행하는 일행들에게 종종 질문을 받는다. 이건 어느 나라 말이에요? 몰타어입니다. 몰타어도 있어요? 몰타는 영어 쓰는 거 아니에요? 영어는 영국 지배 시절 공용어로 정착한 언어이지만 몰타어가 있다.

몰타는 유럽에 있고 유럽 연합 EU에도 속해 있지만, 몰타어는 언어학적으로 대부분의 서양 언어가 속해 있는 인도 유럽어(Indo-European languages)에 속해 있지 않다. 쉽게 말하자면 몰타어는 아랍어의 변종이다. 그래서 아랍어를 조금 알거나, 아랍 이슬람 지역을 여행했던 경험이 있다면 몰타 여행 시 왠지 지명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코미노섬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배에서 본 풍경. 정면이 고조섬
코미노섬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배에서 본 풍경. 정면이 고조섬

반면 언어의 기본 골격은 아랍어지만, 유럽에 속해 있고 지중해의 강대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가 가까이 있고 역시 이 나라들도 몰타에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가 있기에 단어는 이 세 나라, 즉 라틴 로망스 언어에서 차용한 것이 많다. 문화의 변종과 혼합이 몰타어에 그대로 남아있다. 작지만 몰타가 매력적인 이유다.


택시를 타고 가는 빅토리아


페리터미널에서 빅토리아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8km)이지만 택시로도 30분 정도 걸린다.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단독 여행자라면 버스를 이용하는 게 경제적이지만 배차간격이 길다는 단점이 있다. 서넛이라면 택시를 이용하는 게 더 낫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이라 바가지요금 근절을 위해 페리 터미널에 거리와 가격이 표기되어 있어서 실랑이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스코틀랜드 화가 윌리엄 록하트가 그린 빅토리아 여왕의 골든주빌리 기념식
스코틀랜드 화가 윌리엄 록하트가 그린 빅토리아 여왕의 골든주빌리 기념식

코미노섬의 페리터미널에 내리면 여러 대의 택시가 대기하고 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이라 승용차 외에도 승합차 택시도 꽤 보인다. 페리터미널에 서 있는 택시 한 대와 협상을 한다. 요금표에 나와있는 가격대로 갈 것을 확인하니, 그 요금은 최대 4인 기준이고 우리 일행은 6인이니 조금 더 받아야 한다고 한다.

추가 금액이 그리 많지 않아 흔쾌하게 합의를 하고 택시에 오른다. 페리터미널을 출발한 택시는 구불구불한 길을 지그재그로 오른다. 고도가 점점 높아질 때마다 멀리 지중해가 눈에 들어온다.

빅토리아의 중심 광장인 독립 광장. 몰타어로 광장은 영어로 스퀘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 피아자에서 따왔다.
빅토리아의 중심 광장인 독립 광장. 몰타어로 광장은 영어로 스퀘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 피아자에서 따왔다.

택시 기사는 중장년의 몰타 여성이다. 이름은 안나. 대체로 지중해의 사람들의 성격이 조증에 가까울 정도로 쾌활하듯 안나도 그렇다. 초면인데도 거리낌이 없다. 안나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몰타 사람들도 이탈리아 사람 못지않게 쾌활하다라고 말했더니, 대뜸 (No)’라고 말한다.

내가 틀린 얘기를 했나? 싶어 잠시 의아해하는 순간, 자신은 몰타 사람이 아니라 코미노 사람이라고. 영어로 몰티즈(Maltese)하면 몰티즈 강아지뿐만 아니라 몰타 사람이나 몰타의 형용사형이다. 한국을 코리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몰타는 앞서 언급했듯이 크게 몰타섬과 고조섬 그리고 두 사이의 코미노섬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몰티즈는 넓게는 몰타라는 국가의 형용사 외에도 좁은 의미로는 몰타섬의 형용사형이기도 하다.


돈보다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

 

빅토리아 독립광장의 기념품 가게
빅토리아 독립광장의 기념품 가게

안나가 라고 말했던 이유는, 자신은 몰타 국민이지만 몰타섬의 주민이 아니라 고조섬의 주민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몰티즈가 아니라 고지탄(Gozitan)이라고 말한다. , 몰타섬 사람은 몰티즈인데 고조섬 사람은 고지탄이라고 부르는구나. 안나는 고조섬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고조섬에서 일한다. 유럽 남부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강한 애향심을 종종 느끼는 데 안나에게서도 느꼈다.

한참을 올라간 택시는 빅토리아의 중심지인 광장에 도착했다. 중심 광장이라고 해봐야 빅토리아 자체가 인구 7000명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니 유럽의 작은 광장 정도 크기다. 작지만 광장을 둘러싼 오래된 건축물과 광장의 노천카페가 아름답다.

고조 섬 빅토리아의 랜드마크 시타델 요새. 사진= 위키피디아
고조 섬 빅토리아의 랜드마크 시타델 요새. 사진= 위키피디아

택시에서 내릴 때 안나는 명함 한 장을 건넨다. 지중해 지역의 택시 기사들은 대부분 개인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들고 다닌다. 그런데 명함에 있는 이름은 안나가 아니라 남성의 이름이다. 이 사람은 누구냐 물으니 자신의 남편이라고. 남편도 택시를 한다고. 자기는 오늘 할 일을 다 했으니 집으로 가서 쉴 거라고 말한다.

다시 페리 터미널로 돌아갈 때 택시가 필요하면 남편을 부르라고. 몰타뿐만 아니라 지중해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느끼고 부럽기까지 한 점 중 하나는 아등바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장 한켠의 그림의 설명에 잠시 감동을 느꼈다. 이 소재를 택한 화가의 말을 요약하자면,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방식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렸다고. 몰타는 예전에도 수많은 상인과 선원들과의 교역으로 삶을 이어갔다.
광장 한켠의 그림의 설명에 잠시 감동을 느꼈다. 이 소재를 택한 화가의 말을 요약하자면,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방식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렸다고. 몰타는 예전에도 수많은 상인과 선원들과의 교역으로 삶을 이어갔다.

돈에 큰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지만, 삶의 방식은 문화권마다 다르다. 현대의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게으름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중해 식 삶의 방식을 선호한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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