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재일의 정밀 인생, 명퇴 후 ‘볼펜화 작가’로 등극
상태바
반재일의 정밀 인생, 명퇴 후 ‘볼펜화 작가’로 등극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3.11.01 13: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수학교 추천 입학, 정밀가공→군 차트병→공무원 특채, 독학으로 볼펜화의 길
설성문화제 볼펜화 전시회장에 선 반재일 작가
<창녕우포늪_2022> 반재일의 볼펜화.

지난달 충북 음성군 음성읍 설성공원에서 열린 설성문화제의 한 부스 앞에서 우연히 반재일(69) 전 음성군 행정과장을 만났다. 목에 이름표가 걸렸고 그의 옆에는 역시 전직 음성군청 소속이던 공직자들이 함께 있었다.

천막으로 이루어진 부스에는 ‘반재일의 볼펜화 전시회’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내걸렸고 그 옆 부스는 ‘음성군 행정동우회’ 몫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두 곳을 합쳐서 반 작가의 볼펜화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관내에서 몰라보는 이가 없을 정도인 반 전 과장이 볼펜화 작품을 전시한다니 사람들은 우선 생뚱스럽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사람마다 놀랍다는 표정을 어김없이 지어 보였다.

며칠 뒤 반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의 아파트 작업실에는 93점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작업 책상에는 수많은 색깔의 볼펜과 돋보기, 이동이 가능한 전등, 철제 자 등과 함께 그려지던 그림이 놓여 있다.

2014년 말 퇴직한 그는 우연히 접한 칼라 드로잉 본에 색칠을 하며 그림을 완성해봤다. 하지만 세밀하지 못한 밋밋한 감에 만족하지 못하고, 볼펜으로 사진을 그대로 복사하듯 그려내니 그럴듯했다.

만족감에 국내외 여행 때 찍은 사진이나 관내 풍경 등을 그려내며 시간을 보냈다. 작품이라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림에 장소와 연도를 적어 넣는 등 개인의 기록화처럼 또는 풍경화, 사실화처럼 완성해갔다. 어떤 그림은 같은 장소에 존재하지만 카메라의 한 앵글에는 담기지 않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함께 그려낸 역사적 기록화이기도 한 것도 있다. 감우재전승기념관이 있는 <무극전적국민관광지_2023> 작품이 대표적이다.

전승기념관 내에 소장돼 있는 감우리 마을종이 그림 속 나무위에 걸려있다. 이 종은 6.25전쟁 당시 감우리 마을에 있던 것으로 총탄에 맞아 찢겨져 있는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 그림에는 이 종 외에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관련 탑 등을 한 눈에 보이는 사진처럼 정밀하게 확인해주고 있다.

35년 음성군정 산증인

이와 달리 자연 그대로를 촬영해 놓은 사진 같은 자연 풍취의 작품도 있다. <창녕우포늪_2022>은 새벽녘 어스름한 안개 속에 한 어부가 작은 목선에 올라 우포늪 바닥을 장대로 밀며 물길을 가르는 장면으로 마치 현장을 보고 있는 듯 사실감에 빠진다. 갈대숲과 안개, 잔잔한 물결과 그 물 속에 투영되는 어부와 자연의 모습은 자연보다 더 사실적이다. 이 그림은 설성문화제 전시회 때에도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_2020> 그림은 장관이다. 인근 산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원경으로 드론샷과도 같다. 폭포와 도시 풍경이 한 장에 담긴 광각의 원경 사진처럼 느껴진다.

<무극전적국민관광지_2023> 반재일의 볼펜화.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_2020> 반재일의 볼펜화.

음성이 토박이인 그는 1974년 서울의 국립 정수직업훈련원 제1기로 들어가 정밀가공기능사를 취득하고 동양정밀(OPC)에 취직했다. 군대에서는 차트 글씨로 이름을 날렸다. 군단사령부에서 차트병으로 근무하면서 차트 대회에 나가 참모총장상을 수상했다.

회사 생활을 하던 그를 음성군청 공무원의 길로 이끈 것은 선배 공직자인 지역의 한 선배라고 한다. 당시 행정기관은 차트로 주요업무 보고를 하던 시절로 그의 차트 실력을 잘 아는 선배가 군청에 알려 7급 특채로 1980년 1월 1일부로 음성군청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차트 전문직이라 하겠지만 일용직 2년, 기능직 3년을 지낸 뒤 정식 시험을 거쳐 정규직이 됐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설성문화제 심볼마크는 그가 1982년 설성문화제 창설 때 공모에 나서 선정된 작품이다. 군청에서 그는 행정과와 문화공보과에서 대부분 근무하며 행정 및 문화시설, 홍보 등 업무에 집중하게 돼 당시 음성군정 전반을 꿰고 있다. 꼼꼼하고 세밀한 그는 예상과 달리 과단성과 실행력도 겸비해 사무관에 오른 뒤 주로 행정과장과 문화홍보과장을 역임했다.

화훼‧차트 등 정밀인생

심주섭 음성군 행정동우회장은 “반 작가는 현직 때나 지금이나 팔방미인이다”라며 “이렇게 그림 실력을 단 기간에 갖춰 작가 소릴 듣는다는 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동우회에서도 이사로서 봉사에 앞장서고 여행 때는 길라잡이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설성문화제에 전시하게 된 것은 행정동우회 단체 SNS 방에 볼펜으로 그린 경호정 그림을 올리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본 회원들의 높은 평가가 그의 작품을 세상 밖으로 이끈 것이다. 그는 “볼펜화가 뭔지도 모른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게 된 것이지 볼펜화가 따로 있는 것인지 모른다”고 했다. 전시회 때 그림 가격을 묻는 사람들에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대답을 연신 내놨다. 작품을 감상한 사람들은 전문가는 아니겠지만 수준이 매우 높다는 평을 한다. 행정동우회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반재일 작가’로 부른다. 그의 작품은 세밀한 무수한 선의 중첩으로 세상과 인간의 따뜻한 만남을 연결하고 있다.

반재일(오른쪽에서 4번째) 작가 및 심주섭(5번째) 회장 등 음성군 행정동우회 회원들.

‘볼펜화’에 대한 기록은 1975년 화가 임영택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볼펜화 전시회를 가졌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일 볼펜화가도 1996년 국내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작가는 뉴욕타임즈 등 미국 언론의 찬사도 얻었고, 일부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볼펜화 작업에 빠진 반재일 작가는 “군청 근무 때 음성문화예술회관 설계 업무를 지원했는데, 그곳에서 정식으로 전시회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제3막이 열리고 있는 ‘반재일의 정밀인생’에 눈길이 더욱 모아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