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들판의 색계와 공계와 에로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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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들판의 색계와 공계와 에로티시즘
  • 장인수 시인, 국어교사
  • 승인 2023.11.02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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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로 잰다면 가을은 몇 그램일까?

가을은 가장 가볍고 무거운 계절이다.

낙엽 떨구는 나무들은 훌훌 가벼워지고 있다. 풀은 마르며 가벼운 건초가 되어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가을은 점점 헐거워지고 텅 빈 세상으로 바뀌는데, 내면의 가을은 어떠한가?

어제는 벼 8톤 가량을 수확했다. 트랙터 한 대가 하루에 20톤 이상의 벼를 수확한다. 우리 집은 20마지기에서 약 8톤 가량의 벼가 생산되었다. 그동안 들깨 200kg, 태양초 300(180kg), 고구마 27박스(270kg) 등을 수확했다. 그 외에 참깨, 감자, 옥수수, 땅콩, 결명자, 마늘, 해바라기씨, 단호박, 도라지를 수확했다.

그 무게도 상당하다. 마지막으로 콩이 남았다. 텃밭에는 콩 노적가리가 가득 쌓여있고, 밭두렁에는 서리태가 아직도 생육을 하고 있다. 해마다 콩을 200kg 이상은 거두었으니 올해도 비슷할 것이다. 창고와 헛간이 가득 쌓인다. 거기다가 주워오는 도토리와 밤이 서너 푸대가 넘는다. 통통하고 두툼한 배추 130포기와 300여 개의 무가 한창 자라고 있다. 가을은 너무나 무거워 어깨와 허리가 작살나도다.

농부에게 가을은 가장 무거운 계절이다. 가을은 무게의 계절! 이슬은 점점 굵어지고, 찬 공기는 더욱 질량과 밀도가 커지도다. 수확을 끝내고 나면 농부의 어깨는 가장 가벼워진다. 삶과 죽음과 계절을 저울질한다면? 행복과 불행을 총량을 저울질한다면? 농부에게 그 대답을 들어보라.


가을은 얼마나 밝을까?

가을은 조도가 높은 계절이다. 점광원(點光源)이 구석구석에 있다. 가을 달은 눈부시게 맑다. 가을 하늘은 맑고 높아서 천고마비다. 산국, 감국, 쑥부쟁이, 구절초, 맨드라미 만발하여 온통 눈부시게 밝다.

단풍은 어떠한가? 단풍은 붉은색도 노란색도 가장 밝고 세고 투명한 색이다. 몇 럭스(lux)인지 빛의 밝기를 측정하면 아마도 사계절 중에 가을이 가장 밝을 것이다. 밝은 빛은 가을에 다 모이는 것 같다. 가을빛을 구경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국화와 구절초 꽃밭으로, 단풍이 유명한 곳으로 몰려간다. 가을은 눈부신 계절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 빛이 다 지고 나면, 저 빛 다 거두고 나면 깊고 깊은 어둠이 오리니 천지가 폐색하여 겨울이 오리니 그 어둠은 형용할 수 없다. 가을이 겨울에게 넘겨주는 것은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다. 함박눈과 폭설이 쏟아져 세상이 온통 흰빛이어도 흰빛으로 인해 겨울은 더욱 더 깜깜하리니 가을은 밝고 밝아서 어둠으로 가는 것인가? 겨울 들판은 색의 변화가 아침저녁으로 다르다. 변색 앞에서 사람들은 겸허해진다. 농부들은 색깔이 변하는 계절 앞에서 겸손해진다.


쭉정이와 알곡에 대한 단상

잡초를 지심(地心)이라고 한다. 흙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지심매러 가자. 김매러 가자.” 할 때 그 지심이 바로 한자어 지심(地心)에서 나온 말이다.

내 삶은 쭉정이인가? 가라지인가? 알곡인가? 인간에게 이롭지 않으면 잡초이며 가라지다. 인간에게 이로우면 알곡이다.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다. 풀을 뽑아버리고 알곡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야생초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은 쭉정이와 가라지도 약초이고, 잡초도 인간에게 이로운 식생이라고 한다. 야생초를 밥상으로 모시는 순간 잡초도 향기롭고 귀하단다.

그리하여 어떤 농부들은 잡초를 알곡과 차별하지 않는다. 쭉정이도, 가라지도, 온갖 풀들도 소중한 피조물이라고 한다. 이런 철학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유도한다. 내 삶은 잡초인가? 쭉정이인가? 가라지인가? 알곡인가? 영성을 지닌 사람들은 꽤 깊이 고민을 한다.


배추는 가을의 화룡점정이다!

11월의 압권은 터질 듯이 결구가 팽창하는 배추밭과 무밭의 푸르름이다. 11월 중순쯤 다 자란 배추밭과 무밭은 수십 리 밖에서도 보일 만큼 짙푸르렀다. 산천초목이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 오색찬란한 단풍이 들어가는 데 거꾸로 무와 배추는 시퍼런 색깔의 위용을 자랑했다. 바라만 봐도 눈동자에 파란 물감이 들 것 같고, 손가락으로 만지면 손금 가득 파란 물이 줄줄줄 흐를 것만 같았다.

배추와 무의 싱그러움은 관능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속이 차오르는 배추와 무의 몸은 육덕이 풍만한 관능미를 맘껏 뽐냈다. 메뚜기들이 배추밭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우주도 덩달아 팽창하고 관능적으로 보였다. 무와 배추의 푸르른 에로티시즘으로 인해 추수가 끝난 황량한 초겨울 들판은 기운이 넘쳤고, 색계(色界)가 되었다.

나는 무가 다 자라기 전에 거의 매일 무 하나씩을 뽑아먹곤 했다. 알타리무를 뽑아서 샘물이나 둠벙에 깨끗이 씻고 이빨로 껍질을 서걱서걱 벗겨내고 사각사각 염소처럼 씹어 먹었다. 무와 배추 시래기를 주면 소와 염소와 토끼는 환장을 했다. 배추와 무는 환장(換腸)과 환희 그 자체다!

진천 보탑사에 가면 수백 포기 배추가 경내에 심어져있다. 건물마다 둥근 배추가 빙 둘렀다. ‘신박하고 진기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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