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수 씨 이야기…점점 비어 빈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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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수 씨 이야기…점점 비어 빈집이 됐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23.11.0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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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이원면, 114년 전의 집에서 ‘1남 8녀 성장’
20살이 되면 차례로 떠났고, 25년 홀로 산 모친도 작고
낡은 건물 철거했으나 “다시 돌아와서 살 기약은 없어”
개도 식구라면 마지막 반려견이었던 ‘도꾸’와 부모님.
개도 식구라면 마지막 반려견이었던 ‘도꾸’와 부모님. 사진제공=김진희(귀수 씨의 본명)

Prologue

길이 지워지듯 집도 귀퉁이부터 비어간다. 누군가 걸어간 뒤로 그를 따르는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길이 생기지만 발길이 뜸해지면 길도 천천히 지워진다. 심지어는 멀쩡하게 닦아놓은 아스팔트 길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 폐도(廢道)’가 되기도 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빠져나가면서 비어가기 시작한다. 혼자 남아 집을 지키던 사람마저 떠난 뒤에 돌아올 사람마저 없게 되면 비로소 빈집이 된다. 기억에서 지워지기 시작하면 집도 따라서 허물어지는 게 순리다.

길도, 집도 생기고 사라지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이동하고 정주(定住)하는데, 그 흔적은 오래 남아있기도 하지만 이내 지워지기도 한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다가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때로는 이야기가 되고, 역사로 남기도 한다. 남아있거나 지워졌거나 모든 길과, 집은 삶의 무늬다.


1남 8녀가 차례로 곁을 떠나고 남편이 세상을 뜬 후 고 김정순 씨는 이 집에서 25년을 혼자 살았다.
1남 8녀가 차례로 곁을 떠나고 남편이 세상을 뜬 후 고 김정순 씨는 이 집에서 25년을 혼자 살았다.

2023년 가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미동1(구미리) 81에 있는 건물 세 동 가운데 두 동이 헐렸다. 소유자 등록이 이뤄진 시점은 1909. 그러니까 114년 전에도 이 집은 이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소유자 등록만 됐을 뿐, 건물 세 동은 대개의 토담집이 그렇듯 헐릴 때까지도 미등기상태였다.

헐린 건물 중에 목조에 황토를 바른 옛 살림집 40.7는 이미 무너지는 중이었다. 찧은 쌀과 종자, 소금 따위를 넣어두던 창고 11.9는 한때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헐리지 않은 한 채는 시멘트 블록을 쌓아서 지은 43규모의 건물이다. 용도는 잠실(蠶室)로 되어있다. 누에를 키우기 위해 고쳐 짓기 전에는 흙으로 지은 토담집에 사랑방과 외양간이 붙어있었다. , 돼지도 사람과 함께 고쿠락(아궁이의 충북 사투리)’의 온기를 나누며 살았다.

다섯 째, 여섯 째 누나, 두 여동생과 귀수 씨.
다섯 째, 여섯 째 누나, 두 여동생과 귀수 씨.

1973년은 1909년에 처음으로 이 집을 소유했던 이가 이 사랑방에서 세상을 떠난 해이자, 흙집이 블록집으로 바뀌었으며, 외양간이 잠실로 변모한 해이기도 하다. 이 집의 연보(年譜)’를 쓴다면 중요한 3대 사건이 맞물려 일어난 해로 기록하게 될 것이다.


남자였다면 벼슬했을 것


누에를 길렀던 이는 고() 김정순 씨다. 1931년에 태어난 김정순 씨는 20226,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김옥규 씨가 19971월에 작고했으니 25년을 혼자 살았다. 그래도 열여덟 살이 되던 1948년에 이웃 동네에서 구미리로 시집을 와서 함께 산 세월이 두 배 더 길다.

남편과 사별한 후 서예를 배우 김정순 씨. 사진은 작고하던 해(1922년)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월간 옥이네
남편과 사별한 후 서예를 배우 김정순 씨. 사진은 작고하던 해(2022년)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월간 옥이네

1980년대에 들어 누에를 치는 일을 접고 나서 잠실이었던 건물은 다시 별채가 됐다. 이 건물은 김정순 씨가 혼자 집을 지키며 말년을 보낸 공간이다.

김 씨의 말년에 관한 이야기는 옥천군의 사회적기업 고래실이 발행하는 잡지 <월간 옥이네> 20222월호 은빛자서전에 실렸다. 기사가 나가고 나서 불과 넉 달 뒤에 세상을 떠났지만, 기사에 어두운 그늘은 보이지 않는다. 잡지가 발간된 뒤 암 진단을 받았고, 투병의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옥이네 기사에 따르면 김 씨는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 붓글씨를 배우고 성경을 사경(寫經)’하며 말년을 보냈다.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벼슬을 해서 이름을 날렸을 텐데라는 한탄이 2006년 복지관 한문반으로 이끌었다. 읍내에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등 길이 험했지만 8년을 개근했단다. 옥이네에 실린 사진을 보면 김 씨의 서예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엄마 유품만 트럭 세대분


올가을에 건물 두 동을 헐고 빈집을 정리한 사람은 아들 귀수(貴洙) 씨다. 귀수는 본명이 아니라 어렸을 때 부르던 아명이다. 무려 9남매 중 일곱째이자 유일한 아들일 만큼 손이 귀한 집안이라 귀할 귀()’ 자를 넣은 아명을 지어 불렀다. 가족들은 귀수라는 이름을 더 많이 불렀다고 하니, 기사에서도 귀수라고 쓰기로 한다.

작은아버지가 요절한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5대 독자로 태어난 귀수 씨를 안고 있는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요절한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5대 독자로 태어난 귀수 씨를 안고 있는 아버지.

얼마나 귀한 자손이었던지 대학에 가고 성년이 되던 해에 대지 210평과 집에 붙은 밭뙈기 100평이 모두 귀수 씨에게 증여됐다. 은행원인 귀수 씨는 서울 본점이나 해외지점 근무가 잦았다. 휴가를 받아 귀국해서 다행히 임종을 지켰지만, 모친상 당시에도 중국 베이징 분행장(分行長)을 맡고 있었다.

귀수 씨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1년을 빈집으로 두는 동안 풀만 무성하고 동물들이 드나든 흔적도 있어서 마음이 서글펐다고 했다. 작정을 하고 두어 달 동안 주말마다 오르내리면서 어머니의 유품부터 정리하고 빈집 정비를 추진했다.

2022년 6월 김정순 씨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동안 비어있던 집의 일부를 아들 귀수 씨가 올해 철거했다.
2022년 6월 김정순 씨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동안 비어있던 집의 일부를 아들 귀수 씨가 올해 철거했다.

귀수 씨는 어머니가 70년을 사신 집이다 보니 유품만 작은 트럭 석 대 분량을 실어냈다중학교까지만 다니고 도회로 나왔지만, 공무원인 친구, 철거회사를 운영하는 친구, 심지어는 굴착기 기사인 친구까지 모두 나서서 도와줘서 철거작업이 훨씬 수월했다고 말했다. 석면이 들어간 지붕 철거비용으로 700만 원을 보조받은 것도 친구들이 준 정보 덕분이었다.


다시 돌아와 살지는 몰라


두 동을 철거한 자리에는 석축을 쌓고 건물을 지을 터를 닦아놓았지만, 당장 집을 지을 계획은 없다. 남겨놓은 한 동은 어머니가 보일러 등을 교체하고 잘 살폈기 때문에 주말주택으로 쓰기에는 부족할 게 없다.

철거한 자리에는 축대를 쌓고 터를 닦았으나 당장 집을 지을 계획은 없다.
철거한 자리에는 축대를 쌓고 터를 닦았으나 당장 집을 지을 계획은 없다.

귀수 씨는 무너져가는 집을 보는 게 안타까워서 철거했을 뿐 아직은 아무런 계획도 없다면서 어머니가 쓰시던 건물은 방도 두 개인 데다 주방도 사용할 수 있어서 가족 누구든 와서 사용할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장비와 천막 등도 갖춰놓았다.

귀수 씨가 계획이 없다라고 말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4년 남아있는 정년을 은행에서 마치더라도 생애주기를 고려할 때 10년 정도는 더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농업을 생계수단 삼지 않는다면 일자리가 있는 도시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귀수 씨는 솔직히 그 이후에도 잘 모르겠다경남 진해가 고향인 아내는 자기 고향이나 바다가 있는 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어 한다고 귀띔했다.

귀수 씨의 집은 1909년에 등록이 됐지만, 사실은 더 오래 전에는 산자락 바로 밑에 있었단다. 서까래와 기둥 등 부재를 분리해 현재 위치에 그대로 옮겨지었다. 아들이 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귀수 씨의 집은 1909년에 등록이 됐지만, 사실은 더 오래 전에는 산자락 바로 밑에 있었단다. 서까래와 기둥 등 부재를 분리해 현재 위치에 그대로 옮겨지었다. 아들이 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김녕 김씨 집성촌인 마을에는 50여 호가 살았었다. 귀수 씨는 명절 때는 집집이 돌면서 절하고 인사하느라고 12시는 돼야 아침을 먹었을 정도로 완벽한 집성촌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현재는 열 집 정도가 비어있고, 열 집 정도는 외지인들이 들어와 전원주택을 짓고 산다. 옛날부터 눌러사는 집은 10여 가구인 뿐이데 대부분 혼자 사는 터라 비어가는 중이다. 나머지 10여 가구는 주말주택 성격으로 왔다 갔다 하니 반()은 빈집이다.


Epilogue

귀수 씨 집안은 사육신과 함께 죽은 조선 초기의 문신 김문기의 후손이다. 김녕 김씨인 김문기는 1399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그 일족이 구미리로 들어온 것은 조선 중기란다. 귀수 씨의 집은 1909년에 등록이 됐지만, 사실은 산자락 쪽으로 더 위에 있었단다. 서까래와 기둥 등 부재를 분리해 현재 위치에 그대로 옮겨지었다.

그 이유가 기가 막힌다. 음기(陰氣)가 너무 강해서 덜한 아래쪽으로 옮긴 거란다. 그 덕분에 귀수 씨의 아버지는 남동생을 뒀으나 요절했다, 아버지까지 독자로 치면 귀수 씨는 5대 독자다. 1953년생인 큰누나가 스무 살이 되던 1972년에 서울로 간 것을 시작으로 누나 여섯 명과 여동생 두 명이 차례차례 집을 떠났다. 순서가 바뀐 적은 없다.

막내 여동생이 대전에 있는 전문대를 통학하다가 청주에 있는 4년제에 편입해 떠난 게 1998년이다. 이때부터 완벽하게 어머니 혼자의 집이 되었다. 한때 열두 명까지 살았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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