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3지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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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3지대로 간다
  • 주현진 인문학자,한남대 연구교수
  • 승인 2023.11.0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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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인가’질문을 던져야 할 때
주현진 인문학자, 한남대 연구교수
주현진 인문학자, 한남대 연구교수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찬기가 몸에 감긴다. 염려가 부푼다. 다가오는 겨울은 얼마나 추울 것인가? 헐벗은 이에게 더 혹독했던 여름 무더위처럼 센 강도의 추위일까? 시민의, 인문학자의, 혹은 누군가의 피부 아래 갇힌 사유 속으로 이미 스며든 냉기가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기다리면 시간이 가고, 다시 봄이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감내해야만 할 테지. 그런데 이번 겨울과 함께 오는 추위는 쉽게 견딜 수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추위는 봄을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견딜 수 없는 추위를 감내하려는 무용한 의지를 버려야만 한다.

 

사회적 냉기, 거짓말

 

왜냐하면 우리의 신경과 심경을 찌르는 이 불편한 추위는 자연현상에 따른 기후성이 아니라, 정치가 야기하는 사회적 냉기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자의 고상한 언어가 필요 없는) 작금의 한국 정치는 욕심에 찌들어 번들거리는 뺨, 염치없이 벌어지는 입, 황금 냄새에 씰룩거리는 코 그리고 수많은 고통에 흐려지는 눈으로 조합된 벌거숭이 얼굴만을 과시하는 중이다. 정치미학 따위는 내다 버렸는지, 아니면 토건족들이 설립한 거대 성형외과의 기술 덕을 본 것인지, 오른쪽 왼쪽 할 것 없이 공유되는 얼굴이다.

권력 장악을 위해 수단 방법 고려 없이 역사도 부정하고 국익도 부정하려는 오른쪽 얼굴이 역겹다. 사사로운 이익과 욕심으로 범법을 저지르고도 무감한 얼굴을 들이밀며 총선을 준비하는 왼쪽 얼굴도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두 얼굴이 서로를 적당히 물어뜯는다. ‘무능하다’, ‘부패하다’, ‘정치탄압이다등 맥락 없이 단어들이 제시되고, 뒤섞인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국민또는 주권자와는 거리가 멀다.
 

 

관객은 졸고 있는데, 두 광대는 오른쪽 왼쪽에 버티고 서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불쾌한 만담(漫談)을 주고받는 중이다. 이 거북한 졸극(拙劇)을 멈추게 할 이는 누구인가? 시몬느 드 보봐르의 저 유명한 언표를 빌어 (인문학자의 앙가주망실천을 위해) 말해보자. ‘주권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주권자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시민-주권자임을 자각한다면, 적어도 현대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임을 자각한다면, 이 졸극을 중지하라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시민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야 할 것이다. 정치는 위정자를 군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언어와 행위를 평가하고 위정자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퍼모먼스라도

 

그런데 지금 한국 정치에는 주권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치라는 미명 아래 새빨간 거짓말을 일삼는 광대를 따르는 승냥이들만 우글거린다. 이제 이 모리배들의 무감동한 졸극에 종지부를 찍고, 시민 자신을 위한 퍼포먼스를 준비하자. 그러기 위해선 깨어있으면서도 침묵하는 주권자들이 발화해야만 하리라. “우리는 제3지대로 간다라고. 현대 민주국가는 앙시엥 레짐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 하층계급(le petit peuple)’이 시민-주권자가 되겠다는 의지의 발화 위에 건설되어, 그 의지를 지탱하려는 노력으로 진보해온 것이다.

현대 시민국가를 탄생시킨 프랑스 혁명의 주체인 18세기 파리 시민들이 이뤄낸 가장 큰 결실은 아마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공포일 것이다. 이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힘없는 시민계급 3신분의 대표자였던 시이예스 사제(Abbé Sieyès)였고, 그는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파리 시민들에게 다음의 물음을 던졌다. “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정치질서에서 제3신분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 중요한 것이 되고자 한다.” 자유로운 시민이 탄생한 때로부터 이백 년을 뛰어넘어온 지금, 여기에서시민-주권자인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부패한 정치의 터를 버리고, 3지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오른쪽 왼쪽의 구태한 위치설정은 지난 세기의 유물일 뿐이다. 인류세(人類世)의 첨단에 놓인 21세기 인류에게 지구환경에 대한 책임이 있듯이, 한국의 시민-주권자에겐 보편적이고 공동체적인 선()을 지향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는 무시당하는 제3신분이 아님을, 우리에겐 제3지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도록 하자. 성찰의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구처럼, 우리는 지금 고통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시민-주권자로서의 고통과 고뇌는 시민국가를 키워낼 양분이어야 하는 것이지, 헛되이 쓰여선 안된다.

 

우리, 고통을 허비하는구나.

그런 우리가 어찌 미리 앞서, 끊이지 않는 슬픔 속에서

혹여 고통이 끝나지는 않을까 예견한단 말인가. 그러나 고통이란

겨울을 견디는 우리 이파리다. 어두운 우리의 상록이다.

(릴케, 두이노 비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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