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의 어퍼 바라카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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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의 어퍼 바라카 가든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1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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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m 수직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요새
하늘에서 내려다본 발레타 - 위키피디아
하늘에서 내려다본 발레타. 사진=위키피디아

지중해 몰타 기행⑥

고조섬을 떠난 페리는 한 시간 뒤에 몰타섬 발레타 항구에 도착했다. 발레타에 도착할 무렵부터 멀리 두터운 성벽의 위용을 자랑하는 요새가 눈에 들어온다. 발레타 항구에 내려 거대한 성벽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하다. 발레타는 높은 언덕에 있다.

항구에서 발레타 구 시가지로 들어가려면 지그재그로 난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유럽의 오래된 도시, 특히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에는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있는 곳이 꽤 있다는 걸 경험해서 혹시나 하고 구글맵을 들여다보니 항구 가까운 곳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발레타의 위성사진.
발레타의 위성사진.

항구에서 조금 걸으니 수직 절벽을 따라 세운 길고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높이를 확인해보니 60m, 한국의 아파트 층수로는 20층 높이에 해당하는 엘리베이터이다. 한국에도 고층아파트는 많지만, 엘리베이터만 단독으로 세워놓으니 더욱 거대해 보인다. 언제 세운 엘리베이터일까 궁금해 확인해 보니 역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엘리베이터는 근래의 작품이지만 최초의 엘리베이터는 1905년에 세웠다. 그리스 로마 시절에도 동물이나 인력의 힘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있었지만, 기계에 의해 움직이는 근대의 엘리베이터가 탄생한 것이 1852년 오티스(OTIS)의 작품으로 시작했으니 이해할 만하다.

오스만 투르크의 발레타 포위전
오스만 투르크의 발레타 포위전.

하여튼, 엘리베이터의 높이로 발레타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해발 60m면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바다에 붙은 수직 절벽 위의 60m면 상당히 높게 느껴진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하니 무료가 아니라 유료이다. 가격표를 확인하는데 고조섬에서 타고 온 페리 티켓이 있으면 할인을 해준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배에서 내리면서 배표를 버리질 않길 잘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니 투명한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바다가 발아래로 멀어지며 멀리 있는 풍경이 점점 눈에 들어온다. 감탄한 사람들의 환호성이 엘리베이터 안에 넘친다.


전망 좋은 곳에는 포대가

 

100 여년 역사의 엘리베이터, 항구와 어퍼 바라카 정원을 잇는다. 높이는 60m.
100 여년 역사의 엘리베이터, 항구와 어퍼 바라카 정원을 잇는다. 높이는 60m.

구글맵을 사용하면서부터,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위성사진과 지형도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IT의 발달 덕분에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위성사진과 지형도는 평면지도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지리적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내가 있는 여행지를 단편적 평면적인 느낌을 넘어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발레타는 바다를 향해 돌출한 반도에 자리 잡았다. 지중해의 서쪽 포르투갈 스페인부터 동쪽 그리스 터키까지, 지중해의 오래된 도시는 대부분 바다를 향해 돌출한 반도에 자리 잡았다. 반도는 삼면이 바다라서 방어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육지와 연결된 곳에는 성벽을 세우고, 바다로 둘러싸인 삼면 역시 성벽을 세우거나 아니면 집을 간격 없이 빼곡하게 잇대어 지음으로써 성벽의 역할을 했다.

어퍼 바라카 정원의 분수.
어퍼 바라카 정원의 분수.

발레타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니 발레타가 위치한 반도는 만(Bay)의 중심을 향해 돌출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발레타의 지형은 알파벳 M자처럼 생겼다. M의 아래로 돌출한 가운데가 발레타가 있는 긴 반도이다. 게다가 암반 위의 수직 절벽 고지대라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엔 천혜의 지형이다. 로도스섬에서 쫓겨온 기사단이 몰타섬의 여러 장소 중에서도 발레타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와닿았다.

바다를 따라 지은 성벽에는 전망이 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포대(砲台)가 위치했다. 영어로는 배터리(battery)라고 한다. 때리는 부대 즉 포병부대라는 뜻이다. 전지(電池)를 뜻하는 배터리도 역시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전망이 좋다는 말은 시야가 탁 트여 배를 타고 오는 적을 감시하기가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퍼 바라카 정원에서 바라본 발레타. 지형을 이용해 견고한 성벽을 겹겹으로 쌓아 올렸다.
어퍼 바라카 정원에서 바라본 발레타. 지형을 이용해 견고한 성벽을 겹겹으로 쌓아 올렸다.

한반도의 강화도에도 무려 54개의 포대가 섬을 둘러싸고 있었다. 답사를 가보면 하나 같이 시야가 트인 높은 곳에 위치해 전망이 좋다. 몰타섬에서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2차 대전이 끝난 지 오래전이라 발레타의 포대는 지금은 공원과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일부 오래된 대포가 공원이기 이전에 포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바라카의 아름다움은 축복


삼면이 바다인 작은 반도에 위치했기에 발레타는 어디나 전망이 좋지만, 그 중에서도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 어퍼 바라카 정원(Upper Barrakka Gardens)과 로어 바라카 정원(Lower Barrakka Gardens) 두 곳이다. 이름처럼 위쪽 정원이 아래쪽 정원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나오는 곳이 어퍼 바라카 정원이다.

어퍼 바라카 정원의 전망
어퍼 바라카 정원의 전망

어퍼(Upper) 와 가든(Garden)은 영어임이 분명한데 가운데 바라카(Barrakka) 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구글에서 검색을 해봐도 이거다 싶은 답이 보이지 않는다. 몰타를 다녀간 수많은 여행 블로그에서는 영어 표기를 대로 옮겨놨다.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답은 바라카는 중동 지역에서 축복이라는 뜻이라고. 몰타어가 아랍어의 사투리에 가까우니 그럴 듯하다.

봄에 찾은 어퍼 바라카 정원은 정말 축복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푸른 물빛의 지중해 건너 발레타 옆의 또 다른 미니 반도에 비치한 오래된 세 요새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Vittoriosa, Senglea, Cospicua 세 도시를 흔히 쓰리 시티라고 부른다. 발레타는 복잡한 구조의 만에 위치해 바다로 지는 해를 직접 볼 순 없지만, 비스듬하게 기운 태양 빛의 각도가 빚어내는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

포대로써의 기능은 잃었지만, 어퍼 바라카에서는 매일 정오에 예포를 '때린다'. 바다 건너는 쓰리 시티. 사진= 픽사베이
포대로써의 기능은 잃었지만, 어퍼 바라카에서는 매일 정오에 예포를 '때린다'. 바다 건너는 쓰리 시티. 사진= 픽사베이

온갖 꽃으로 가득한 봄날의 정원과 전망도 아름답지만, 해 질 무렵 이곳을 찾으면, 한낮의 뜨겁던 태양이 지며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건조하고 쾌적한 바람이 피부에 와닿을 때 이것이야말로 삶의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퍼 바라카 정원은 몰타섬에 정착한 기사단이 지었다. 초기에는 기사단 전용 회합장소이자 연무장으로 사용했다. 1800년대 프랑스 군대가 몰타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몰타인은 어퍼 바라카 정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정원의 가운데에 있는 분수를 중심으로 곳곳에 조형물이 놓여있지만,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몰타의 정치인보다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가는 이름 없는 사내아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상이다. 조각상의 아이들 옷차림은 남루하다. 조각상에는 내용의 설명이 없어 구글로 검색해서 읽어보니, 20세기의 몰타의 아이들을 묘사했다고.


어떤 이상도 전쟁 앞엔 무력

 

20세기의 몰타의 아이들을 묘사한 어퍼 바라카 정원의 조형물
20세기의 몰타의 아이들을 묘사한 어퍼 바라카 정원의 조형물

고대부터 현대까지, 몰타는 작지만 동서남북 지중해의 교차로에 위치했기에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이는 강대국이 호시탐탐 노리는 곳일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부터 1942년까지 2년 동안 벌어진 몰타 포위전(Siege)이 있었다.

영국을 주축으로 하는 영연방 연합군과 독일 이탈리아 주축군이 몰타의 패권을 노리고 2년 동안 맞붙었다. 모든 강대국 간의 전쟁이 그렇듯, 전쟁 당사자 간의 피해도 크지만 애꿎은 전쟁터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저 사내아이는 포탄이 퍼붓는 곳을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걸까. 어쩌면 몰타의 슬픈 숙명이기도 하겠다.

일몰의 발레타 원경 사진=픽사베이
일몰의 발레타 원경 사진=픽사베이

갑자기 미일 중러 사이에 끼인 데다 분단국이기까지 한 우리의 신세가 겹쳐지니,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이 참혹하게 느껴진다. 불과 80년 전에 이곳이 포탄이 날아들던 격전지였을 거로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울 뿐이다. 모든 이상과 이론도 전쟁 앞에서는 무력하다. 어쨌든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몰타 발레타의 어퍼 바라카에서 빌어본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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