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춘리 김 노인, 다시 희망을 찾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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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춘리 김 노인, 다시 희망을 찾아 나서다
  • 최기영 농부, 수필가
  • 승인 2023.11.10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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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핵폐수 방류를 중단시켜야 한다

요즘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연춘리 김 노인이 말한다. 대부분 축산농민이 그렇듯이 새벽 5시에 소 사료를 배식하는 것으로 시작해 어스름히 어둠이 깔려야 종일 신었던 장화를 벗을 수 있다. 40년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똑같은 일과였다. 그렇게 일을 해 온 덕분에 소 몇 마리와 1000여 평 농지가 이제 2만 평 이상 넓어졌다. 소 역시 200두를 사육하는 목장주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일을 줄이고 취미 생활을 하며 남은 인생을 즐기라고 한다. 철없는 사람들이다. 아직은 일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가난을 물려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후 자금을 뺀 나머지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여유가 있어야 한다. 자식들이 살면서 돈 때문에 기죽지 않고 살게 해줘야 한다. 그것을 위해 오늘까지 뼈와 살이 녹아들도록 살았다.

그런데 요즘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일본 후쿠시마 핵 폐수를 바다에 버린다는 텔레비전 보도 이후다. 그때부터 가슴에 돌을 얻어 놓은 것처럼 답답하다. 일어설 때 뼈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다. 늙어서 그런가보다 싶었기도 하지만 보지 말아야 뉴스를 시청한 탓이다. 텔레비전을 보다 뉴스가 채널을 돌려 다른 방송을 시청한다. 그날 괜히 사람들 말이 많아 호기심에 한참을 봤다. 그날 이후 기억에서 놓아버린, 잃어버린 공포가 엄습해 왔다.

어렸을 때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징용 갔다 돌아온 집안 아저씨 한 분이 옆집에 살았다.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 조무래기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19458월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 히로시마 비극을 무용담처럼 자주 이야기해 줬다. 당시 그는 히로시마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도시 공장 노역장에서 강제노역을 당하고 있었다.

그때 쾅! 번개가 치는가 했는데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가릴 것 없이 타고 녹아 생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봤다. 대단했다. 원자폭탄 위력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강도 일본이 항복했다. 그는 다행히 지나가는 먼 바람에 스쳤을 뿐. 직접 피폭을 당하지 않은 덕분에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고향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일흔을 앞둔 지금도 어린 시절 들었던 핵(원자폭탄) 이야기는 무서운 공포다. 문제는 귀국 이후 아저씨의 삶이다. 아저씨는 고향에 돌아와 아이를 셋 낳았는데 하나만 정상이고 둘은 뇌성 마비 환자로 태어났다. 정상인이던 아들마저 스무 살 성년이 되면서 눈이 멀어 1m 밖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전국 병원을 모두 다녔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느 의사 선생도 속 시원하게 원인을 말해주는 곳이 없었다. 눈이 멀어 불편한 삶을 살던 아들은 어느 날 운 나쁘게 허벅지 뼈 골절을 당했다. 병원에서 봉합 수술을 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뼈가 붙지 않아 병원에 누워 지내다 결국 자진(自盡)했다. 큰아들의 죽음은 아저씨 사후다.

김 노인의 아저씨 역시 어린 장애 아들 둘을 남긴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세상을 등졌다. 처음에는 간혹 손에 쥐가 난 것처럼 마비가 왔다. 마비 현상이 반복되더니 결국 온몸에 뼈가 흐늘거려 제대로 걷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배가 고파 음식을 먹으면 모두 토해냈다. 큰 병원 전문의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세상을 저버렸다.

아저씨 가족의 비극은 일본에 징용에 끌려갔을 때 핵(원자폭탄)에 피폭당한 탓이다. 그때 죽어가는 아저씨를 살리기 위해 동네 어른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무당은 산소 자리가 나빠 뫼를 이장해야 한다거나 한을 풀지 못한 조상 영혼을 달래줘야 한다면서 하루가 멀다고 굿판을 벌였다. 하지만 아저씨와 먼 형제인 우리 부모 생각이 달랐다.

아저씨가 일본에 징용에 끌려갔을 때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탓이라고 했다. 핵물질이 유전자에 퍼져 피폭자 자신은 물론 그의 자손들까지 모두 암에 걸리거나 기형적 아이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핵에 오염되면 현대의학으로도 치료를 못 한다. 아저씨가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며 한숨을 쉬었다.

나라가 망해 징용에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아저씨네 유족은 지금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안타깝게 그의 아들 모두 젊은 나이에 핵에 오염으로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친척 아저씨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곧 닥칠지 모르는 공포다.

아이들에게 농약 묻은 쌀도 먹이지 않겠다, 심지어 소가 먹는 짚도 농약이 묻은 것 같으면 먹이지 않았다. 정말 어렵게 유기농 농법을 배워 농사를 지어왔는데 텔레비전 뉴스를 본 후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쌀이야 스스로 알아서 하면 된다. 그러나 바닷물에 절여야 맛을 낼 수 있는 젓갈은? 소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들의 어두운 미래를 보고 있어야 하는데 자괴감이 든다. 며칠 사이 더 늙었다. 한동안 편안하던 가슴 통증이 요즘 부쩍 심해지고 있다. 시간이 더 할수록 사는 재미가 없다.

김 노인은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던 고귀한 희망을 다시 찾아 나서겠단다. 일본, 그들의 자식과 우리의 자식들을 위해 핵 폐수를 바다에 버리는 못된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늙은 몸이 나서겠단다.

연춘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에 있는 동네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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