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처럼 난 발레타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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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처럼 난 발레타의 골목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11.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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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를 가도 생산자의 주거지는 열악
하늘에서 본 성 엘모요새 - 위키페디아
하늘에서 본 성 엘모요새 - 위키피디아

지중해 몰타를 가다⑦

보통의 유럽 소도시 구시가는 좁은 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초행자는 헤매기에 십상이다. 구도심 내부를 복잡하게 설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할 때 방어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어퍼 바라카에서 바라본 로어 바라카 (붉은 사각형 안).
어퍼 바라카에서 바라본 로어 바라카 (붉은 사각형 안).

길이 좁으면 많은 수의 군대가 들어오더라도 한꺼번에 진입할 수 없고 바리케이드를 쳐서 방어하기도 쉽다. 게다가 길이 미로처럼 구불구불 복잡하면 외지인들은 방향감각을 쉽게 잃기 마련이다.

반면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 구시가의 길은 바둑판처럼 나 있어 초행자도 길을 찾기가 쉽다. 구시가의 길을 바둑판처럼 설계했다는 이야기는 성벽이 뚫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는 바다를 향해 돌출한 반도에 있다. 반도는 작고 좁지만 지대가 높고 가파르다.

발레타 성벽의 거대한 해자.
발레타 성벽의 거대한 해자.

반도와 육지의 연결 부위에는 높고 두텁게 성벽을 세웠고 성벽 앞에는 거대하고 깊은 해자를 팠다. 바둑판 모양의 길과 높은 언덕의 반도에 위치한 덕분에, 발레타 구시가를 걷다 보면 좁지만 길게 뻗은 길의 끝으로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종종 마주친다.


골목은 가장 큰 매력


어퍼 바라카 가든(upper barakka garden)에서 나와 로어 바카라 가든(lower barraka garden)으로 발길을 돌린다. 로어 바라카로 가는 길 역시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구시가 곳곳에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기도 하지만, 삼면이 바다인 작은 반도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바다를 끼고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발레타의 흔한 골목길의 풍경.
발레타의 흔한 골목길의 풍경.

해 질 무렵 어퍼 바라카에서 로어 바라카로 가는 길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골목 안으로 비스듬하게 쏟아붓는 햇빛으로 지어내는 풍광은 낮이나 밤과는 또 다르다. 똑같은 장소이지만 해 질 무렵에만 느낄 수 있는 풍광이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이슬람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몰타 특유의 건축물이 자아내는 정취는 매우 이국적이다. 고조섬의 빅토리아에서 본 몰타 특유의 다양한 원색의 발코니 창과 노란 사암 건축물, 그리고 지중해 바다의 푸른 빛이 한꺼번에 어우러진다.

창밖으로 레일을 만들어 빨래를 내거는 건 지중해 공통이다. 빨래가 있다는 말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이다. 바깥쪽은 겉옷을 속옷은 보이지 않게 안쪽에 넌다.
창밖으로 레일을 만들어 빨래를 내거는 건 지중해 공통이다. 빨래가 있다는 말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이다. 바깥쪽은 겉옷을 속옷은 보이지 않게 안쪽에 넌다.

발레타의 골목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발레타의 가장 큰 매력이자 몰타나 발레타의 관광 홍보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없이 발레타의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주하는 풍광에 감탄할 때가 여러 번이다.

해안을 따라 난 윗길로 로어 바라카로 가면서도 이런 골목을 여러 번 마주한다. 조금 넓은 골목에는 노천카페가 있다. 아름다운 골목에는 어김없이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촬영하는 여행자나 관광객을 본다. 로어 바라카는 어퍼 바라카보다 조금 작지만 역시 아름답다.

발레타의 고양이.
발레타의 고양이.

정원의 가운데엔 어퍼 바라카처럼 분수가 있고, 분수의 뒤편으로 마치 그리스 신전처럼 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 있다. 프랑스 군대의 몰타 점령 시 몰타 반군을 도운 영국의 해군 장교 알렉산더 볼 Alexander Ball’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약소국이 강대국으로부터 점령을 당할 때 또 다른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또 다른 강대국이 해방자일지 아니면 새로운 점령자일지. 하여튼 알렉산더 볼은 몰타 주민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기념 건축물도 주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지었다고. 1810년 지어진 기념 건축물의 건축가 역시 몰타 사람이었다.

로어 바라카 가든 - 알렉산더 볼 기념 건축물.
로어 바라카 가든 - 알렉산더 볼 기념 건축물.

로어 바라카 정원의 전망대에 서니 어퍼 바라카에서 바라본 전망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우측으로 크루즈항과 옛 어시장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차도로 사용되는 해자 건너편에는 거대한 종이 들어있는 원형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몰타 공성 포위전 기념물이다.

2차 대전 당시 몰타는 연합국이던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주축 국가이던 이탈리아의 맹렬한 폭격을 받았다. 7000여 명 이상의 몰타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를 기념하여 포위 공성전 50주년이 되던 해인 1992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프랑스로부터 몰타를 해방시킨 영국의 해군장교 알렉산더 볼 - 위키피디아
프랑스로부터 몰타를 해방시킨 영국의 해군장교 알렉산더 볼 - 위키피디아

종탑의 우측 편으로는 누워 있는 무명용사의 추모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강대국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인 몰타의 역사적 운명이 슬프게 다가온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종탑에는 일몰의 풍경을 담으려는 여행자와 관광객이 가득하다.


오각형의 별을 닮은 요새


로어 바라카에서 나와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발레타가 위치한 반도의 정수리 끝에 지은 성 엘모(Saint Elmo) 요새로 향한다. 우측 아래로 마치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의 바닷가에 한국 전쟁 시절 지어진 판잣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작고 낡은 집들이 보인다.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 부산 영도의 흰여울 마을 같아 반갑다.

로어 바라카의 전망 - 우측 하단 건물은 옛 어시장.
로어 바라카의 전망 - 우측 하단 건물은 옛 어시장.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역시 나의 추측이 맞았다. 높은 귀족들이 살았던 곳이 아니라 어부의 거주지역(Fishermen Village)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생산자의 주거지는 열악하다. 슬픈 사실이다. 지금 어부 마을은 여행자용 숙소, 특히 젊은 배낭여행자의 숙소로 쓰이나 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붕위에 일몰을 보러 앉은 젊은이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어부의 마을을 지나 계속 걷다 보면 거대한 건축물이 나온다. 지금은 국립 전쟁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성 엘모 요새이다. 하늘에서 보면 오각형의 별처럼 생겼다.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을 막기 위해 1552년 요한 기사단이 세웠다. 오스만튀르크와 공방전 당시 28일을 버텼으나, 끝내 함락되었고 600여 명의 기사단은 전멸했다.

로어 바라카의 전망 - 몰타 포위 공성전 추모 기념물 (Siege bell memorial)
로어 바라카의 전망 - 몰타 포위 공성전 추모 기념물 (Siege bell memorial)

지금의 모습은 여러 번 개보수 및 증축을 거쳤지만, 원형과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성 엘모 요새를 찾았을 때는 마침 보수 공사 기간이라 내부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느새 해도 기울고 가로등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발레타의 밤이 깊어 간다.

발레타의 옛 어부 마을
발레타의 옛 어부 마을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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