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 성 요한 공동 대성당의 카라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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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성 요한 공동 대성당의 카라바조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11.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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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가 되어 떠돌며 그림 그린 천재화가

지중해 몰타를 가다⑧

다음 날 아침, 호텔 조식을 마친 뒤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발레타로 향한다. 전날 늦은 오후에 도착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발레타 대성당을 보기 위해서이다. 발레타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 요한 공동 대성당이다. 세례 요한에게 봉납한 성당이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 요한 공동대성당 내부. 사진=정연일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 요한 공동대성당 내부. 사진=정연일

몰타섬을 점령한 요한 기사단도 세례 요한에서 이름을 따왔다. 대성당 앞에 공동이 붙은 이유는 주교좌 성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 요한 대성당은 요한 기사단을 위해 지어졌기에 주교좌 성당이 아니었다. 몰타의 주교좌 성당( Cathedral)은 수도인 발레타에서 15km 정도 거리의 오래된 요새 도시 임디나에 있다.

1577년 완공 당시엔 소박했던 성당이 증축을 거치면서 내부가 매우 화려해지며 주교좌 성당이 아님에도 발레타 대성당의 명성이 높아지자, 1820년 몰타의 주교는 성 요한 대성당을 대체 주교좌 성당으로 승인했다. 1831, 아이반호를 쓴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월터 스콧은 성 요한 대성당을 방문하고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눈에 띄는 내부를 갖춘 웅장한 교회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발레타 성요한 공동대성당. 사진=정연일
발레타 성요한 공동대성당. 사진=정연일

발레타 대성당의 명성을 높인 건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내부 외에도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1571 ~1610)의 제단화 덕분이다. 1608, 카라바조가 그린 성 제롬세례 요한의 참수가 발레타 대성당에 있다.

지중해 일대의 카톨릭 국가 특히 이탈리아의 대성당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성당은 무료입장이지만 종탑과 유물관은 입장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발레타의 성 요한 공동 대성당은 입장료가 있다.

 

성 요한 대성당의 입장권, 카라바조의 세례 요한의 참수가 있다.
성 요한 대성당의 입장권, 카라바조의 세례 요한의 참수가 그려져 있다.

무려 15유로, 한화로 2만 원이 넘는다. 대성당 내부가 화려하다고 하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에서 내부가 화려한 대성당을 수없이 봐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나, 굳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대성당을 찾은 이유는 카라바조가 그린 제단화를 보기 위해서다. 성당에 안치한 제단화는 외부 대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그림을 보고 싶으면 직접 찾는 수밖에 없다.


다혈질의 난폭한 천재


이탈리아 이름의 구성은 이름 뒤에 출신지를 붙여 성으로 사용했던 경우가 많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 레오나르도는 이름이고 빈치(Vinci)는 그가 태어났던 토스카나 지방의 마을 이름이다. (da)나 디(di)~of라는 뜻이다. 카라바조의 전체이름(full name)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이다. 다 빈치처럼 카라바조 역시 그가 태어난 밀라노 동쪽의 작은 마을 이름에서 나왔다.

대성당의 중앙제단 홀 바닥은 기사단 400인의 무덤이 바둑판 처럼 대리석판 아래 안장되어 있다. 크기와 모양은 같지만, 석판마다 묘비명 디자인과 문구는 다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묘비명은 '나를 짓밟는 너도 곧 짓밟힐 것이다.' 라는 뜻. 유머러스 하면서도, 인생의 유한함을 깨우치게 한다. 무심한 관광객들은 무덤을 짓밟고 지나간다.
대성당의 중앙제단 홀 바닥은 기사단 400인의 무덤이 바둑판 처럼 대리석판 아래 안장되어 있다. 크기와 모양은 같지만, 석판마다 묘비명 디자인과 문구는 다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묘비명은 '나를 짓밟는 너도 곧 짓밟힐 것이다.' 라는 뜻. 유머러스하면서도, 인생의 유한함을 깨우치게 한다. 무심한 관광객들은 무덤을 짓밟고 지나간다.

카라바조가 살아 있을 때나 지금이나 그의 이름보다는 성 즉 출신지로 불리는 이유는 카라바조의 앞 세대에 미켈란젤로라는 천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켈란젤로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린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 카라바조를 떠올리지 않는다.

카라바조는 살아생전 두 가지로 유명했다. 모든 사람이 인정했던 천재적인 재능과 예민하면서도 다혈질로 인한 난폭했던 기질이 그것이다. 카라바조는 젊어서부터 숱한 사고를 쳤는데, 로마에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던 1606년 마침내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만다.

상대는 로마의 권세가의 아들이라 카라바조에게 참수형 선고가 내려지고, 카라바조는 나폴리몰타시칠리아나폴리로 이어지는 긴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비록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죄자이지만,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현지의 귀족과 권력자(특히 주교)에 의해 카라바조는 도피처마다 환대를 받았다.

환대의 이유는 결국 그림을 그려 달라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전작 90여 점 중에 30여 점이 도피 기간에 그려졌고, 도피처였던 도시마다 카라바조의 작품이 남아 있는 성당이 있다.

카라바조가 그린 세례요한의 참수와 성 제롬
카라바조가 그린 세례요한의 참수와 성 제롬

나폴리를 거쳐 몰타로 건너간 카라바조는 세례 요한의 참수와 성 제롬을 그려 요한 기사단의 환대와 후원을 받지만, 몰타에서도 요한 기사단의 단원을 술자리에서 중상을 입히는 사고를 치고야 만다. 카라바조는 항상 칼을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꼴이 되었기에 카라바조는 요한 기사단에게도 쫒기는 신세가 되어 몰타를 떠나 친구가 있던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향한다. 시칠리아섬에서도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 다시 나폴리로 돌아간 카라바조는 자객의 습격을 받아 크게 부상을 입었다.

 

카라바조의 도피경로 (위키피디아)
카라바조의 도피경로 (위키피디아)

 

결국 나폴리를 떠나 피렌체로 향하던 배가 중간에 정박한 항구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때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나 카라바조는 사면받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일본 순회전시까지 찾아가


개인적으로 카라바조를 처음 알게 된 건 1999년 여름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였다. 지금은 횟수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드나든 이탈리아이지만, 당시엔 처음이라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했다.

세례요한의 참수. 카라바지오는 짓굿게 그림속에서도 장난을 쳤는데, 잘린 세례요한의 목에서 쏟아져 흐른 피로 자신의 이름을 그림 속에 넣었다.
 카라바조가 그린 성 제롬. 희랍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초대 교부이다. 깡마르고 헐벗은 몸에 뭔가를 쓰고 있으면 거의 성 제롬이다. 성 제롬을 묘사한 그림엔 해골이 빠지지 않는데, 인생의 유한함을 상징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로화 도입 이전 리라화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고액권이었던 10만 리라(한화 6만원 정도에 해당) 의 모델이 카라바조였다. 가이드에게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카라바조라는 화가라고 답했다. 유명한 사람이냐? 물으니 나를 쳐다보던 어이 없어 하는 눈빛이 아직 기억난다.

그 뒤로 카라바조에 푹 빠져서, 유럽의 미술관을 다니며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으면 빼놓지 않고 찾아갔다.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의 성당에 있는 카라바조의 작품도 찾아다녔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과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에 가장 많지만, 유럽의 유명한 미술관에는 어김없이 한두 점씩 있다.

카라바조의 자화상과 그의 작품이 앞 뒤에 있었던 이탈리아 리라화'
카라바조의 자화상과 그의 작품이 앞 뒤에 있었던 이탈리아 리라화'

2019년 가을 마침내 로마 보르게세를 찾은 날, 카라바조의 걸작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유명한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을 보려고 갔는데 없었다. 미술관 직원에게 다윗은 어디 있냐고 물으니,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한 듯 너희 나라에 가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나고야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카라바조 특별 초청전에 대여 중이었다. 화가가 똑같은 그림을 두세 점 그리지 않는 이상, 그 작품을 보러 갔는데 대여 중이면 아쉽지만 포기하거나 아니면 대여 전시 중인 곳으로 가서 보는 방법밖에 없다.

나고야 시립미술관의 카라바조 특별전 포스터
나고야 시립미술관의 카라바조 특별전 포스터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바로 일본 나고야행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했다. 나고야는 처음이었지만 카라바조를 보기 위해서 갔다. 나고야 전시가 끝나면 오사카 도쿄, 센다이 순으로 전시가 계속 이어져, 다음에 다시 로마에 가서 보르게세를 찾는다고 해도 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고야 시립미술관에서 마침내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을 봤을 때의 감동이란.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했다. 카라바조는 다윗의 얼굴은 자신의 소년 시절을, 골리앗의 얼굴은 자신의 중년 시절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참수해서 목을 들고 있는 꼴이다. 자신의 비범한 운명을 스스로 희화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비극적 종말을 예감한 것일까. 모든 인간은 소년과 중년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풍자한 것일까.


진품에서 느껴지는 아우라


발레타 대성당의 입장권을 끊고 들어간 성당의 내부는 소문처럼 화려했다. 화려함에 현혹당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일행들을 이끌고 카라바조의 제단화부터 보러 갔다.

 

카라바조의 그림 부분. 사진=픽사베이
카라바조의 그림 부분. 사진=픽사베이

제단화라고 하니 성당의 중앙제단(Altar) 근처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근처를 찾았더니 보이지 않아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측면의 소성당(chaple) 에 있다고.

가로 5.2m 세로 3.6m 크기의 대작이지만, 종교적 이유인지 아니면 그림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인지 제단 앞에 접근 금지 줄이 쳐 있어서 가까이서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아무튼, 로마,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의 성당에 있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모두 본 것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카라바조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인터넷에서 고화질 이미지로 보는 것이 더욱 선명하지만, 발터 벤야민의 철학처럼 진품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라는 게 있으니까.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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