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전쟁과 유상(遊賞) 공간’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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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전쟁과 유상(遊賞) 공간’ 조명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3.11.3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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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문화연구회 제34회 학술회의 성료…‘전쟁과 놀이의 형상을 찾아서’
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가 주최한 제34회 학술회의 ‘충주, 전쟁과 놀이의 형상을 찾아서’의 종합토론 모습. 사진=김천수 기자

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가 ‘충주, 전쟁과 놀이의 형상을 찾아서’라는 특색 있는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지난 24일 오후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제34회 중원문화학술회의는 조선시대 충주지역에서 발생한 전쟁 및 관련한 인물들의 충주에서의 유상(遊賞‧노닐며 구경하다) 등에 대한 토론으로 진행됐다.

충주시가 후원한 이날 학술회의는 높은 열기 속에 5시간 동안 4명의 주제발표와 이에 대한 4명의 토론이 있었다. 행사는 예성문화연구회 정재성 사무국장의 사회로 주제발표를 진행하고, 곧이어 길경택 예성문화연구회 회장이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이어갔다.

먼저 길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충주는 고대로부터 물길과 철의 주생산지로서 시대별, 세력별 각축의 장이었다. 내륙이지만 외적의 침입도 전란 때마다 있었다”면서 “충주 사람들의 인식에도 전쟁과 삶에 대한 어떤 인식과 의식적 특성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충주의 놀이와 그와 연관된 문학에서의 전쟁 모습과 의식적 현상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고 이번 토론회의 방향을 설명했다.

이어진 주제발표는 첫번째로 이새롬 한국국학진흥원 전임연구원이 ‘충주의 유상(遊賞) 공간과 문학’을 발표했다. 이 연구원은 충주의 지리적 특징과 명소, 한시를 통해 본 충주 유상처의 특징을 짚었다. 그는 조선시대 충주의 유상 공간을 소개하고, 충주 목사로 부임했던 박상과 남유용의 시를 분석해 충주에 대한 공간 인식을 살폈다.

신립‧임경업 장군 등 회상

발표에 따르면 충주는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깝고 하천이 발달해 번성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이로 인해 특히 조선 문인들은 정치적으로 불리한 시기에 충주에 은거했다. 또한 충주는 강을 두르고 산을 벤 지형이기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나 피난지로써 역사가 남아 있다. 탄금대에는 신립 장군의 일화가 있고, 월악산의 덕주사와 덕주산성에는 고려시대 피난처라는 설이 전해진다.

16세기와 18세기에 각각 충주 목사로 부임한 박상과 남유용의 충주 유람과 시문을 소개했다. 박상은 정치적으로 좌절을 겪은 뒤에 부임해 여러 차례 탄금대를 방문해 그 경치를 통해 자신의 내적 갈등을 심화시킨 점이 특징이다. 남유용은 임경업 사당, 탄금대, 장암 구택, 누암서원 등을 유람해 공간에 얽힌 역사를 떠올리며 회고의식을 표출했다. 이를 통해 충주 유상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토론에서 어강석 충북대교수는 팔봉서원이나 누암서원 등 조선 중기부터 후기에 세워진 서원 중심 유람의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또한 충주의 대표적 유상처를 꼽아 시간적 흐름과 유상자에 따라 어떻게 시각이 달라지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고 제안했다.

두번째로 홍현성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은 ‘신립 서상의 기억 방식과 의미 시론(試論)’을 발표했다. 홍 위원은 신립 서사의 기억방식으로 <신립과 원귀 전설> 속 아이러니를 통해 애매형을, <달천몽유록> 속 담론으로 회피형을 들었다. 결론을 대신해 ‘기억 방식과 이야기의 생명력’을 제시했다. 윤계선과 황중윤이 같은 이름으로 남긴 <달천몽유록>을 분석했다.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의 상흔에 대한 구비 서사의 문헌을 통해 신립 장군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비교해 살핀 것이다.

충주 유상처 연구 필요

토론에서 어경선 예성문화연구회 고문은 탄금대에 충주시가 건립한 ‘팔천고혼위령탑’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1592년 4월 28일(양력 6월 7일) 도순변사 신립, 방어사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과 8000여 명의 군사들이 왜군을 맞아 장렬히 전사한 혼령들을 위로하는 위령탑이란 점을 밝혔다. 충주 사람들은 매년 위령제를 지내며 이를 기억하고 그들의 충절을 되새기고 있다고 강조했다.

세번째 주제는 권혁래 용인대 용로름대학 교수가 ‘임경업 장군은 어떻게 충절의 표상이 되었나’를 발표했다. 임경업의 실제 삶과 공적, 고소설 <임경업전>에 형상화된 임경업, 임경업의 삶과 충절의 의미로 나눴다.

권 교수는 신립(1546~1592)과 임경업(1594~1646)의 생존 시기를 비교하고, 신 장군을 ‘임진왜란 때 삼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전투 때 탄금대에서 배수진 작전을 폈다가 참패하고 순절한 장수’로, 임 장군을 ‘충주 단월 출신이며, 의주 백마산성을 충석무비(築城武備)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중국 지역을 오가며 파란만장한 반청복명(反淸復明) 활동을 한 충절의 장수’로 기억된다고 밝혔다.

이선의 <임장군전>(1688년, 숙종 14)과 1689년 송시열의 <임장군경업전> 저술 등으로 1697년(숙종 23)에 임경업은 복권되었다. 이후 충주 충렬사, 선천 충민사 등에 제향 되었다.

권 교수는 이번 발표에서 충주지역의 충절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임경업의 실제 삶과 공적에 대해 살피고, 이를 고전소설 <임경업전>에 그려진 종묘사직의 수호자, 반청복명의 장수상과 대비해 보고 동시에 작품에 그려진 충절의식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토론에서 이복규 서경대 교수는 임경업 장군의 충절은 충주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 전체의 충절을 표상하는 분이라고 보아야 더 자연스럽다고 밝혔다. 전, 전설, 소설, 굿 등 지역을 초월해 다양한 매체로 기억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허원기 건국대 교수는 ‘목계마을 민속축제의 중원문화적 특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중원문화권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마을축제지만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토론에서 김준기 경희대 교수는 문화재 지정 이전이라도 아카이브 구축, 문화콘테츠 개발 등이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한편, 일각에선 목계마을 민속축제와 이번 학술회의 주제 사이의 연관성이 높지 않은 것 같다는 지적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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