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부와 특수부의 ‘묘한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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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수부와 특수부의 ‘묘한 기시감’
  • 김종대 전문기자
  • 승인 2023.12.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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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수사력이 권력 압도한 아픈 역사
등장인물과 상황설정 등 대부분 역사적 사실 일치
이태신의 행주대교 저지, 광화문 진격 ‘극적 요소’

영화 서울의 봄 톺아보기

영화에서는 경복궁 앞에서 장태완(극중 이태신) 사령관이 홀로 철조망을 넘어가며 반란군에 저항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창작이다.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는 경복궁 앞에서 장태완(극중 이태신) 사령관이 홀로 철조망을 넘어가며 반란군에 저항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창작이다.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울의 봄>을 관람한 청년 세대는 주로 저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느냐?”며 궁금해한다.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어도 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럴 만도 하다. 반란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라고 준 총으로 하극상을 자행하고 전방의 병력을 빼돌려 반란에 이용했다.

불법적인 계엄사령관 연행으로 헌법은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반란을 일으킨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을 지내고 천수까지 누린 데 반해 반란에 맞선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반란을 진압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이를 막지 못한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장관 등 국가지도부의 이해할 수 없는 무능력은 또 어떤가.

이 쿠데타에 이어 신군부는 19805월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끔찍한 유혈 사태를 겪는다. 신군부가 만든 초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는 약 6만여 명에 이르는 시민을 영장 없이 체포하였고 그중 3만여 명은 삼청교육대에 수용되어 모진 고초를 겪는다.

대규모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해직을 동반하며 언론은 검열되었다. 대학에는 경찰력이 상주하며 학생들을 감시하였고, 노동운동에도 공안의 탄압이 휘몰아쳤다.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이후 유신의 어둠으로부터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던 한국 사회는 1212 쿠데타라는 치명적 일격을 당하고 신군부가 만든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갔다.

시민의 자유가 전면적으로 제한되고 군부의 철권통치에 한국 사회는 중세식 암흑시대에 또다시 진입한다. 이 영화는 관람객이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다 지나가도록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게 만든다. 반란 주역들이 찍은 사진 위로 훗날 그들이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기업체 사장, 총장, 군사령관, 보안사령관으로 줄줄이 영전되어 한 시대를 누렸다는 사실이 자막으로 흐르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짐을 느낀다.


전방의 병력을 동원하다


19791212일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한남동 육군총장 관저에서 울린 총성으로 시작된 하나회의 군사 반란은 그 어떤 작가의 상상력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긴박한 드라마였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일군의 장교집단은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총장을 공관에서 연행한 데 이어 9시간 만에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고 총리 공관에 있던 최규하 대통령까지 장악했다.

영화 ‘서울의 봄’은 높은 평점과 입소문을 타고 1000만 관객을 넘어설 기세다.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울의 봄’은 높은 평점과 입소문을 타고 1000만 관객을 넘어설 기세다.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처음에는 반란군이 불리해 보였다. 서울에 병력을 투입하기에는 장태완 사령관의 수도경비사령부와 정병주 사령관의 특전사가 훨씬 유리한 위치였다. 총장이 연행되었지만, 육군본부는 참모차장이 인근 3군사령부 예하 병력과 수경사, 특전사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반면 반란군은 지휘부만 경북궁의 30경비단에 모여있을 뿐이지 그들의 부대 대부분은 전방에 위치하여 서울로 불러들이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애초 이 충돌은 어느 쪽이 전투 병력을 서울로 먼저 진입시키느냐의 싸움이었다. 반란군의 참모총장 연행 직후 빚어진 혼란과 우연이 겹치면서 누가 사태를 빨리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행동하느냐에 따라 주도권이 결정될 판이었다. 이 시점에서 반란군의 성공 비결은 확고한 목표 의식과 연줄, 그리고 정보력이었다.


권력의 줄기세포, 하나회


박정히 대통령이 만든 군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는 육사 기수별로 대략 10명 안팎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철저하게 비밀로 관리되기 때문에 조직원들끼리도 같은 조직원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 번 가입하면 선후배가 합의한 결정에 절대로 복종해야 하며, 조직을 배신하는 자에게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서약한다.

박정희의 비호를 받은 일심회는 훗날 하나회로 이름을 바꾸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면서 군 내에 최고의 실세 집단이 된다.
박정희의 비호를 받은 일심회는 훗날 하나회로 이름을 바꾸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면서 군 내에 최고의 실세 집단이 된다.

이 조직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난 계기는 19734월에 터진 윤필용 사건이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과 13명의 육군 장교가 쿠데타 모의를 했다며 숙청된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군 내 사조직인 일심회를 적발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전두환과 노태우는 보안사로 연행된다. 조사를 받던 중에 청와대의 박종규 경호실장이 강 사령관에 압력을 넣어 이들을 구제하게 된다. 박정희의 비호를 받은 일심회는 훗날 하나회로 이름을 바꾸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면서 군 내에 최고의 실세 집단이 된다.

쿠데타는 약 열흘 전부터 모의되고 준비되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의 휘하에 제13,59 공수특전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9공수를 제외하고 세 개의 공수여단이 하나회 지휘관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장태완 사령관의 요청으로 정 사령관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9공수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반란군 측의 계략에 빠진 9공수가 회군하는 순간 대세는 반란군 측으로 넘어갔다. 당시 특전사의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 세 명은 하나회 소속으로 직속 상관인 정병주 사령관을 배신했다. 9공수 출동이 무산되면서 최세창은 정 사령관에게 투항을 권유하면서 회유하였으나 정 사령관은 이를 거부한다.

이에 3공수 체포조가 사령관실에 난입하자 김오랑 비서실장이 이에 저항하다 전사하였고, 정 사령관은 총상을 입은 채로 연행된다. 특히 김오랑 소령을 사살한 장본인이 평소 호형호제하던 박종규 중령이었다는 점이 비극이다.

장태완 사령관은 긴급히 요청하여 출동한 30사단 병력마저 윤성민 참모차장이 돌려보내고 반란군은 노태우의 9사단 병력을 행주대교를 넘어 서울에 진입시킨다. 영화에서 장태완 사령관이 단신으로 행주대교에서 반란군과 맞서는 장면은 창작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직접 맞선 적은 없다.

9공수 병력이 회군하고 나자 안도의 한숨을 돌린 반란군은 1공수를 투입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된다. 김진기 헌병감이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거듭 반란군에 속지 말 것을 촉구하였으나 순진하게도 신사협정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셈이다.

이후 참모차장은 육군본부의 요새인 B-1 벙커마저 포기하고 수경사로 쫓겨간다. 아마도 아군끼리 무장 충돌을 꺼린 참모차장의 우유부단함이 반란군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선사한 셈이다.

병력의 연이은 철수에 격분한 장태완 사령관이 취사병과 행정병까지 전부 동원하여 장갑차 4대로 경복궁으로 진군하려 했지만 이때는 노재현 국방장관이 병력 이동을 중지하라고 지시한다.

영화에서는 경복궁 앞에서 장 사령관이 홀로 철조망을 넘어가며 반란군에 저항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창작이다. 실제로는 출동이 좌절되고 나서 장 사령관은 자신의 심복이면서 하나회 소속인 헌병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부대 안에서 체포된다. 군사 반란에 맞선 대부분의 장군은 평소 자식 같았던 부하들로부터 배신당했다.


배신과 지략이 거둔 승리


적은 병력에다가 전투 병력에 대한 지휘권도 없는 보안사령부가 군 내부의 통신을 감청하고 각종 지연과 학연까지 총동원하여 육군 주요 직위자에 대한 회유, 기만, 설득, 협박을 가하면서 반란군은 지략의 승리를 거둔다.

3공수 체포조가 특전사 사령관실에 난입하자 김오랑 비서실장이 이에 저항하다 전사하였고, 정병주 사령관은 총상을 입은 채로 연행된다.
3공수 체포조가 특전사 사령관실에 난입하자 김오랑 비서실장이 이에 저항하다 전사하였고, 정병주 사령관은 총상을 입은 채로 연행된다.

애초 이런 반란이 가능했던 것은 전두환이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면서 수사권과 정보력을 자신의 정치 무기로 활용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은 이미 초토화되어 전두환이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고 합수부는 정부 각 부처의 차관들까지 불러들여 업무보고를 받는 등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전두환이 청와대의 박정희 사금고에서 발견한 96000만 원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400억 원의 가치가 있다. 이 중 2억 원을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에게 상납하려는 장면은 돈과 권력을 멋대로 주무르는 독재자의 면모까지 보인다. 사조직을 통한 충성의 위계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와 자금력까지 확보한 전두환을 제어하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1933년에 의회 과반수도 안 되는 나치당의 히틀러 총리가 일약 독재자로 전권을 부여받은 것은 힌덴부르크라는 무능한 대통령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보면 역사는 항상 악인보다 적당히 착한 사람 때문에 망하는가 보다.


윤석열과 다르면서 같은 점


<서울의 봄>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은 과연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반란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가, 라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물리력으로 집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을 거치면서 수사권을 자신의 정치 무기로 삼아 문재인 정부의 조국 민정수석과 추미애, 박범계 법무장관을 차례로 제치고 권력의 정점을 향해 돌진해 왔다.

이미 검찰의 권력이 정권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다. 어쩌면 이것이 1212 당시의 최규하 대통령과 비슷하다면 과장인가. 물론 지금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1979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다. 게다가 지금은 각종 정보통신 기기의 발전으로 은밀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난 문재인 정부 당시에 우리는 전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검찰 특수부 출신들의 사조직을 목격하였고, 그들이 새로운 권력이 되는 상황도 경험했다. 검찰의 특수부 라인은 현대적으로 변형된 하나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수사권을 앞세워 상관을 조사하고 연행함으로써 수사기관은 언제든 권력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도 새삼 목격하였다. 아마도 <서울의 봄>역사는 반복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준다고 하겠다. 이것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진짜 이유다.

●김종대

병장 출신 군사전문가. 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계 입문 전에는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인수위원회와 국방부 장관 보좌관을 거쳤다. 2007년 말 외교‧안보월간지 ‘디앤디포커스’(디펜스21+)를 창간하고 편집장으로 기사를 썼다. 최근 유튜버로 맹활약 중이다. 저서로는 <서해전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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