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다에서 돌아온 선원들의 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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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에서 돌아온 선원들의 쉴 곳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12.0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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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디 좁은 발레타의 해협(海峽) 거리

지중해 몰타를 가다⑩

과거 성 요한 기사단장의 궁(Grand master palace)이자 현재는 몰타의 대통령 집무실 맞은 편은 성 조지(St. George)광장이다. 발레타 구시가에 있는 광장중에서 가장 크다. 잉글랜드의 수호 성자인 성 조지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봐서, 기사단 시절에도 광장은 있었지만 영국 점령 시기에 이름이 바뀌었나 보다.

성 조지 광장. 과거 기사단 경비대 건물은 지금은 이탈리아 문화원으로 사용 중이다.
성 조지 광장. 과거 기사단 경비대 건물은 지금은 이탈리아 문화원으로 사용 중이다. 사진=정연일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로 검색해 보니 짐작대로 애초엔 기사단장 궁(Palace) 광장이었다가 영국 점령 이후 바뀐 것이 맞다. 지금은 민중 광장(people’s square)이라고 하지만, 영국의 흔적이 너무나 진하게 남아 있어 그런지 아직도 구글맵에는 성 조지 광장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 조지는 초기 기독교의 성자인 게오르기우스를 말한다. 정교회와 가톨릭 그리고 성공회 루터교 등 기독교의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성인이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서양 기독교 문명에서 널리 전파되어 여러 나라에서 남자 이름에 많이 사용한다.

 

영국식 빨간 전화부스. 몰타에 남은 영국의 흔적 중 하나.
영국식 빨간 전화부스. 몰타에 남은 영국의 흔적 중 하나.

영어로는 조지, 프랑스어는 조루주, 이탈리아어는 조르지오, 독일어는 게오르크, 스페인어로는 호르헤, 그리스어로는 요르고스 등이 모두 성 게오르기우스에서 나왔다. 헝가리의 유명한 문예 이론가인 루카치의 이름 죄르지도 역시 게오르기우스에서 유래했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상징은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 문양인데 월드컵 때마다 눈에 보이는 잉글랜드의 국기가 여기에서 나왔다.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 여러 도시의 수호성자이기도 하고,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기에 기사, 군인, 보이스카우트 등의 수호성자이기도 하다. 성 게오르기우스를 알아보기는 매우 쉽다. 갑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말을 탄 기사가 긴 창으로 용과 싸우고 있으면 성 게오르기우스이다. 여기엔 유명한 전설이 있다.

발레타의 해협 거리의 1967년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발레타의 해협 거리의 1967년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성 게오르기우스가 어느 나라를 지나다 용의 제물로 바쳐지는 여인을 만났다. 그동안 어린 양을 용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양이 부족해지자 드디어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게오르기우스는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용을 처치하겠다고 했다. 마침내 용이 나타나자 게오르기우스는 창으로 용을 찔러 죽였다. 이에 감동해 왕을 비롯해 그 나라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동상이나 조각 그리고 그림은 유럽의 구시가의 광장이나 성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광장의 이름이 성 조지이니 광장의 중심이나 구석에 당연히 성 조지의 동상이나 조각이 서 있어야 하는데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발레타의 영국식 펍(pub )내부의 분위기는 영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벽에 걸린 TV 에서는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가.
발레타의 영국식 펍(pub )내부의 분위기는 영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벽에 걸린 TV 에서는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가.

광장의 이름은 지우지 못했지만, 동상은 치웠나 보다. 삼면으로 광장을 둘러싼 바로크 양식의 건물은 각각 기사단의 보물(Treasury) 창고와 중앙 경비대, 그리고 경비대 숙소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용도가 바뀌면서 지금은 이탈리아 문화센터로 사용된다.


영국의 유산 잉글리쉬 펍


성 조지 광장이 있는 공화국 거리(Republic st)에서 옆으로 한 블록을 가면 유명한 해협 거리(Strait st.)가 나온다. 영어 단어 스트레이트(Strait)는 해협(海峽)이다. 좁다는 뜻도 있다. 발레타의 구시가 거리는 폭이 그리 넓지 않지만 스트레이트 거리는 더욱 좁다. 건장한 남자 서 넛이 들어서면 길이 막힐 정도이다.

발레타 시장 City market 의 내부 모습. 지하는 식자재, 지상층은 푸드코트로 구성되어 있다.
발레타 시장 City market 의 내부 모습. 지하는 식자재, 지상층은 푸드코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해협 거리인가보다. 이렇게 좁은 골목이 유명한 이유는 과거 이곳이 몰타 바깥에서 유명했던 홍등가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디나 항구도시는 외지 선원들이 출입하기 마련이다. 거친 바다에서 돌아와 몰타의 발레타에 하선한 선원들은 술과 장미를 찾아 좁은 스트레이트 거리로 몰려들었다.

과거에는 홍등가로 유명했지만, 오래 방치되었던 스트레이트 거리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거치며 근래엔 힙(hip)한 분위기의 바와 카페가 숨어있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인파로 붐비는 공화국 거리의 한 블록 옆인데도 스트레이트 거리에 가면 상대적으로 한적하다. 숨어있는 듯한 골목이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지 않는다. 맥주 한 잔을 하며 쉬기 좋다.

푸드코트의 필리핀 식당.
푸드코트의 필리핀 식당.

발레타에는 영국과 아이리쉬 펍이 많다. 어떤 펍(Pub)의 입간판에 쓰여있는 영어 문구에 유머가 넘친다. 그냥 지나치려는 발걸음을 되돌리게 만드는 문구다. 영국식 펍에서 영국식 에일(Ale) 맥주를 마시니 몰타가 아니라 잠깐 영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몰타에 남겨진 영국의 유산 중 하나다.

스트레이트 거리에서 나와 발레타의 재래시장(Food market)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유럽 어느 도시나 도심에 있는 재래시장은 현지의 풍물과 식자재를 구경하기에도 좋고, 다양한 음식을 파는 푸드코트가 있어 한 끼를 해결하기도 좋다.

 

푸드코트의 필리핀 음식.
푸드코트의 필리핀 음식.

영어로는 발레타 마켓 또는 시티 마켓이지만 몰타어로는 ‘Is-Suq tal-Belt’이다. 아랍어로 시장을 수크(Souq)라고 한다. 기독교 문명의 기사단 이전에 지배했던 아랍 이슬람의 영향이 몰타어에 남아 있음을 다시 실감한다.

발레타의 시장은 여느 유럽 도시의 식품 시장처럼 실내 시장이다. 시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에는 다양한 식자재 상과 슈퍼마켓이 있고 지상층에는 디귿 자 모양으로 벽면을 따라 다양한 푸드코트가 있다. 푸드코트엔 몰타 음식과 유럽 음식 외에도 인도, 중동 그리고 필리핀 음식점이 많다. 유럽의 항구도시를 다니다 보면 가끔 필리핀 음식점을 발견한다. 인력 수출이 외화 획득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필리핀 경제구조로 인해, 필리핀 선원들도 역시 많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를 떠나 오랜 시간 바깥을 떠돌다 보면 고향 음식이 그리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푸드코트를 돌아보다가 필리핀 음식을 주문했다. 영국식 펍에서 맥주 한 잔을 마셨지만, 다시 맥주도 주문했다. 영국식 펍에서 마신 맥주는 에일이고 발레타 마켓에서 마시는 맥주는 몰타 라거니까 다른 맥주다. 무엇보다도 음식이 짜서 맥주 없이 그냥 먹기는 힘들다.


재탄생한 오페라 극장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시티 마켓에서 나와 다시 공화국 거리로 돌아와 발레타 성문 입구 쪽으로 걷다 보면, 마치 고대 그리스 신전의 폐허 같은 유적이 눈에 들어온다. 남아 있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보면 여기에 신전이 있었나? 착각할 정도다.

옛 왕립 오페라 극장 유적, 지금은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 중이다. 건축가는 렌조 피아노.
옛 왕립 오페라 극장 유적, 지금은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 중이다. 건축가는 렌조 피아노.

신전이 아니라 왕립 오페라 극장의 유적이다. 1866년에 지었으나 2차 대전 당시인 1942년에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파괴되기 전 옛 사진을 보면 정말 우아하고 아름답다. 어떤 명분이든 전쟁은 파괴하는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에 몸서리를 친다.

종전 후 오페라 극장은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렌조 피아노에 의해 야외 공연장으로 재탄생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종종 야외 공연이 열린다. 렌조 피아노는 원형을 완전히 복원하지 않되, 폐허의 흔적을 남기면서도 이곳이 과거 오페라 극장임을 상기시키는 기막힌 작품을 만들었다.

왕립 오페라 극장의 옛 모습.
왕립 오페라 극장의 옛 모습.

문화재 원형을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이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봄밤에 야외극장에서 보는 오페라는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다.

성문 입구에 거의 다 도착하면 발레타 구시가에서 보기 드문 현대식 건물이 나온다. 새 의회 건물이다. 역시 렌조 피아노의 작품이다. 의회 건물과 맞닿은 현대식 발레타 성문 역시 렌조의 작품이다.

발레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골목이다. 잊지 못한다.
발레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골목이다. 잊지 못한다.

애초 몰타 정부는 오페라 극장의 폐허에 새 의사당 건물을 지으려 했지만, 렌조의 설득으로 야외 공연장으로 복원했다. 렌조는 성문 입구에 새 의사당 건물을 짓는 대안을 제시했고 받아들여졌다. 모던한 양식으로 지어 설명을 읽지 않으면 의사당 건물인지도 모른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야외 공연장 자리에 하마터면 의사당이 들어설 뻔했다. 도시 문화 정책은 정부나 시민뿐만 아니라 거버넌스라고 하는 민관 협의가 중요함을 다시 느낀다. 물론 시민의 감시와 안목이 가장 중요하다. 렌조 피아노의 작품인 새 성문(City gate)을 빠져나와 발레타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중세도시 임디나(Imdina)로 향한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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