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낮게, 느리게가 주는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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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낮게, 느리게가 주는 감동
  • 이지상 가수, 작곡가
  • 승인 2023.12.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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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마시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커피
여기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가 있다. 사진=이지상
여기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가 있다. 사진=이지상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조용히 흘러나왔던 작은 카페였다. 살짝 무뚝뚝해 보였던 바리스타는 주문대 위로 비치된 물품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두 분쯤 기다리고 있었고 커피를 한잔 주문 했는데 나 또한 살가운 어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단 배가 아팠다. 청주 오창에서 가장 맛있다는 곰탕집에서 해장을 했으나 그것만으로 정신이 온전할 리는 없었다. 지난 밤의 뜨거운 뒷풀이로 인한 불상사였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전날 밤 벌어졌던 난장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해야겠다.

대전으로 가는 중부고속도로가 훤히 보이는 들판에 유기농 영농조합 <하늘농부>가 있다. 카톨릭 농민회 출신 대표가 충청도와 강원도 일원의 농민들을 유기농 경작으로 유도해 거기서 재배되는 농작물을 판매 대행하는 법인이다. 해마다 추수가 끝난 오창 들판에선 1년을 수고한 농부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대개 추석이 지난 한 달 뒤쯤 되니까, 잔치가 시작되는 날의 어스름 저녁은 붉게 솟아오는 보름 달빛에 들판이 휘청거리기 일쑤다.

전국에서 공수한 고기와 해물, 직접 담근 나물들 때문에 잔치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넋을 잃고는 한다. 물론 그 안주에 곁들이는 술 한잔이 과해도 괜찮은 날이기도 하다. 나는 그 잔치에 매해 초대를 받았다. 달빛에 홀렸을지 술에 홀렸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시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은 자랑이다.

이 자랑을 들은 어떤 음악평론가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엽기적인 무대를 꼭 한번 보고 싶다는 말로 나를 웃게 하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면 마당에 피운 모닥불 위로 여전히 흥에 젖은 이들의 노랫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이 아름다운 밤을 두고 귀가하는 것은 잔치를 만들어 낸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다.

바로 그 가을음악회. 사진=이재표
바로 그 가을음악회. 사진=이재표

하늘농부 음악회는 가을을 지나는 길의 끝에 겨울로 가는 문이었다. 오던 방향대로 멈추지만 않으면 닿는 문. 조금만 더 걸으면 첫눈이 내리지 않아도 늘 겨울이었다. 내가 우연히 진천군 문백 휴게소에 있는 그 작은 카페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등주의는 어디서 왔는가


올림픽 구호는 더 빨리(faster), 더 높이(higher), 더 힘차게(stronger)’.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 1894년에 제안한 것이다. 어릴 적 교과서를 통해 배웠고 무조건 외웠다. 아마도 내 안에 아직도 일등주의의 환상이 남아있다면 그건 나의 나름 성실한 공부 습관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해인가 함께 올림픽 경기를 시청하던 중 이 구호를 들은 어머니가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아주 사람을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뭘 더 하라고.” 내가 들은 올림픽 구호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였다.

올림픽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가장 높이 뛰는, 가장 강한 인간을 뽑는 놀이이다. 뭇 생명들의 놀이는 아니란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남자 우사인 볼트보다 화가 난 곰이 100m를 더 빨리 뛴다. 장대높이뛰기의 황제 아먼드 듀플랜티스는 6m22cm를 넘은 기록을 갖고 있는데 그 정도는 방금 내 피를 빨고 도망간 모기가 더 높이 난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에 의해서만 통제가 가능하고 그것이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를 보장하는 척도라는 신념이 이 구호 속에 담겨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챈 셈이다. 당연히 인간에게도 등급이 부여되고 최고의 등급에 해당하는 몇몇만이 이 아름다운 미래의 향연을 즐길 자유가 있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가난했던 무학의 어머니께 배웠다는 것이 또한 놀랍다.

사람의 중심은 아픈 곳입니다라는 표제를 마음에 품고 산지가 꽤 됐다. 아픈 곳을 먼저 치료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집합체가 사회인 만큼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은 단지 성장 사회의 어두운 면 정도로 취급당했고 성장 추종 세력들이 베푸는 시혜나 나눔의 대상자였을 뿐 중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왜 부자에게 돈을 주면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면 비용이라고 하는가브라질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의 말을 곱씹으면서 인류가 서로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 시혜나 나눔의 대상자가 되어 비굴하지 않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에 대한 비루한 질문은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세기말 1999년에 결성한 시 노래 운동 나팔꽃의 구호는 작게, 낮게, 느리게이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커피


커피는 아직 배달되지 않았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노래가 끝나고 아마 두어 곡쯤은 더 들었을 시간이 지났다. 내 앞의 손님들이 약간 투덜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그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어눌하지만 또렷하게 전해준 그 말은 . . . . . . . 서 감. . . . 그 한마디를 나는 울컥거리며 들었다. 커피를 받아 들며 향기를 먼저 맡지도 않았다. 익숙한 어투로 주문을 받고 가능한 빨리 만들어 내어야 이윤의 폭을 넓히는 여타 매장의 커피와는 전혀 다른 향기일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2016년 충북 장애인 기능 경진대회 바리스타 부분 은상을 수상했다. 사진=진천군 장애인복지관
그녀는 2016년 충북 장애인 기능 경진대회 바리스타 부분 은상을 수상했다. 사진=진천군 장애인복지관

카페의 주인인 바리스타는 유진 씨다. 그녀가 뇌병변을 앓고 있는 것은 카페 벽면에 붙여놓은 기사를 보고 알았다. “. . . . . 서 감. . . . 느릿한 그녀의 말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그럼에도 이 한잔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정성 어린 표현이었다.

이 카페의 향기에 마음을 맡기기 위해 나는 매해 한 번씩은 들렀다. 커피 향을 맡고 유진 씨의 그 말 한마디를 들어야 비로소 가을을 등지는 버릇이 생기게 됐다. 지난 가을에는 두 번이나 들렀다. 첫 방문 때는 매장에 물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했지만 나는 물걸레질로 바쁜 그녀에게 방해가 되는 듯하여 오히려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에 또 들를 핑계가 생겨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했었다. 문백 휴게소에 있는 카페 맨드리. 그녀가 내어 주는 느릿한 커피 그리고 더 느릿한 말 한마디로 행복한 시간이 지난 가을에 있었다. “작게, 낮게, 느리게그리고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려면 여럿이 가라.” 아프리카 속담에 담긴 의미를 커피잔에 담아 바리스타보다 더 느릿하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음미하는 시간은 별일 없는 한 내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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