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기리기 일념, 이덕남 여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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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기리기 일념, 이덕남 여사 별세
  • 조창완 전문기자
  • 승인 2023.12.1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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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자택서 별세, 27일 인천가족공원에서 영면
장남 신수범과 결혼, 신채호 선생 국적 회복 등 앞장
여사의 뜻 따라서 학문적 성과, 스토리텔링 이어가야
서울의료원에 마련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 빈소.
서울의료원에 마련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 빈소.

우리나라 인물 가운데 자체로 학문의 숲을 이룰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혹자는 퇴계나 율곡 이이를 꼽을 수 있지만, 사고의 깊이나 넓이를 생각하면 세종대왕이나 다산 정약용, 단재 신채호를 넣을 수 있다. 이들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단재를 깊이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거기에 아나키스트라는 오명아닌 오명이 뒤집어쓰고 있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단재를 계승하는 다양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열심히 활동한 이 가운데 한 명이 이덕남 여사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가 1124일 별세했다. 향년 79.


비극적인 가족사의 끝점일까


1910년 경술국치가 있던 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가족이 지금에 이르는 길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여정 가운데 하나다.

사실상 첫 부인과 이혼 상태였던 단재는 3.1운동이 있었던 1919, 베이징에 있는 옌징대학(지금의 베이징대) 의예과에 유학 온 박자혜 여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소개로 단재를 만나 1920년 결혼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박자혜 여사와 신혼을 보냈던 베이징 진스팡지에. 사진=이재표 기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박자혜 여사와 신혼을 보냈던 베이징 진스팡지에. 사진=이재표 기자

이들은 베이징 서쪽 진스팡지에(錦什坊街)의 셋집에 신혼을 꾸렸고, 1921년 음력 1월 아들 수범을 낳았다. 하지만 이불 한 채도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던 단재는 모자를 결국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단재는 1928년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다가 1928년 대만 지룽항에서 체포돼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감옥에서도 우리 역사에 관한 글을 집필했던 단재는 19362월 숨을 거뒀다.

어린 아들 신수범 선생에게 소식이 와 시신을 모시고 귀국해 청주에 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남편이 사망한 후 박자혜 여사는 한국에서 조산원의 산파로 생계를 꾸렸지만, 일제의 탄압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1943년 작고했다.

1936년 중국 뤼순감옥에서 비통하게 옥사한 단재 선생에게 남은 혈육은 부인 박자혜(1895~1943) 여사 사이에 태어난 아들 신수범(19211991) 씨와 둘째 두범 씨였다. 하지만 두범 씨가 1942년 어린 나이가 죽고, 해방을 한 해 남긴 1944년 박자혜 여사도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20대 초반에 부모님을 여윈 신수범 선생의 삶은 고통스럽기가 일제 강점기 치하랑 별 차이가 없었다.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의 단재 신채호를 향한 분노가 곧바로 그 아들에게도 향했기 때문이다. 단재는 임시정부 초기부터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려 했던 이승만을 없는 나라 팔아먹으려는 악한으로 평가했다. 이런 관계를 알아서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 등이 나서 단재의 아들을 보호하려 했지만, 여느 독립운동가의 자식이 그러했듯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이덕남 여사 2019년 귀국


그런 가운데 신수범 선생은 김해 출신의 이덕남 여사를 만나 1966년 결혼했고, 딸 지원씨와 아들 상원씨를 낳았다. 이 여사는 단재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섰던 여장부였다.

12월 8일, 신채호 선생 탄신일에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청주예술의전당 앞에 있는 동상을 참배하고 있다. 사진=이재표 기자
12월 8일, 신채호 선생 탄신일에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청주예술의전당 앞에 있는 동상을 참배하고 있다. 사진=이재표 기자

이덕남 여사는 단순히 시댁 일로 신채호 선생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하다가 단재 선생의 호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국적 회복에 앞장선 것도 그였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만큼 단재는 일제에 의한 호적을 거부했었다.

이덕남 여사는 단재 선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호적을 얻지 못한 독립운동가 집안을 모았다. 또 수차례 폭우에 무너진 단재 선생 묘 정비에 앞장섰다. 2004년 여름에는 지형적인 문제를 생각해 이장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이덕남 여사는 딸 지원씨가 베이징을 중심으로 사업을 했기 때문에 주 거주지는 베이징의 한인타운인 왕징이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의 관련 행사가 있을 때는 귀국해 활동했다. 2017년에는 서울, 청주에 각각 설립·운영됐던 단재기념사업회를 통합했고, 최근까지 사업회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베이징에 있으면서는 단재 선생의 유적을 찾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베이징에 있는 단재 선생의 유적지들은 도시개발로 인해 이제 거의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베이징에 있는 중국 동포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며 단재에 관한 소식을 더 얻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다. 중국 공산상 당학교에 있어 당안(黨案)을 볼 수 있는 최용수 교수 등 많은 사학자들과 교류해 단재 선생뿐만 아니라 김산 등 중국에서 활동했던 이들을 찾아내는 데 역할을 했다. 이덕남 여사는 2019, 168개월의 베이징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사드로 인해 한중관계가 힘들어진 데다 지병이 있어 돌아왔고, 지난달 24일 별세했다.


단재, 역사 이상 콘텐츠의 보고


우리나라에서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지만, 단재 신채호가 쓴 여러 권의 역사서를 읽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식민사관에 짓눌린 이기백의 한국사 등은 금과옥조처럼 여긴다. 그런 이들은 단재 사학을 실증이 없는 막연한 사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단재 신채호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삶은 단순히 학문적 깊이를 넘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삶을 실천하고 떠난 이다. 단재의 삶에는 유불선 등 우리나라 전통 사상이나 우리가 처음 접했던 서양 문학, 사상 등이 잘 혼융되어 있다.

아직 완전히 모이지는 않았지만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간한 아홉 권에 모여있다. 1~3권이 역사(1=조선상고사, 2=조선사연구초, 3=독사신론·대동제국사서언·조선상고문화사), 4권은 전기(을지문덕·수군제1위인 이순신·동국거걸 최도통·이태리 건국 3걸전), 5권이 신문·잡지, 6권이 논설·사론, 7권이 문학, 8권이 독립운동, 9권은 단재론·연보로 묶였다.

문제는 단재의 지식 체계가 워낙에 넓고 광범위해서 한 사람이 모두 풀어쓰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조선상고사는 뤼순 감옥에 투옥된 지 3년째인 19316월부터 조선일보에 라는 제목을 연재한 글을 엮은 책이다. 고대부터 시작해, 삼국시대의 마지막은 백제부흥운동까지 만을 엮었다.

하지만 이 책을 쓰기 위한 서문을 보면 단재가 동사강목등 조선의 역사책은 물론이고, 중국의 사기춘추등 수많은 텍스트를 참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가 더 정비된 이 시대 사학자라고 해서 단재가 쓴 내용을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단재가 베이징에서 발행했던 잡지 ‘천고’의 표지
단재가 베이징에서 발행했던 잡지 ‘천고’의 표지.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21년 베이징에서 한문체로 발간한 천고(天鼓)는 단재가 대부분의 글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독립운동을 다룬 스트레이트 기사는 물론이고, 고고학, 평론, 서양사, 칼럼 등 내용에 아무 장벽이 없는 1인 작업의 절정이다.

이후에도 폭력에 기반한 항일운동의 핵심이 된 조선혁명선언을 썼고, 크로포트킨 사상이나 아나키즘에 관해서도 다양한 견해를 남겼다. 결국 일반인이 단재의 사상을 관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단재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단재의 텍스트나 동서양의 이론이나 사학을 딥러닝 한 인공지능(AI) 정도다. 물론 인공지능이 나온 산출물은 전문 학자들에 의해 수없이 재검토한 후 어느 정도 결과물이라고 확인될 것이다.

단재는 구국영웅들의 이야기를 스토리로 엮었다. 을지문덕 표지와 삽화.
단재는 구국영웅들의 이야기를 스토리로 엮었다. 사진은 을지문덕 삽화.

단재는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이순신, 최영 등을 되살리는 스토리텔링의 대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에 보면 단재 신채호가 간 길도 가장 위대한 성공의 여정일 수 있다.

그는 절대 타협하지 않고, 직접 국제 첩보전에 뛰어든 용감한 모습도 보인다. 그가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서 수감됐을 때, 일제가 그를 어떻게 회유했을지는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변절하지 않았고, 출옥을 1년 반 정도 남기고 옥사한다.

아들 고 신수범 선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형 만료는 19371017, 현재는 일상생활에 이상 없으며, 건강도 양호하다라는 서신을 보냈는데, 갑자기 병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단재의 여정은 사실 우리 근현대가 전환되는 시기에 가장 모범이 되는 만큼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질 의미가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대형 스토리텔링은 없다. 대신에 선택등의 연극으로 청주 지역에서, ‘꿈하늘등으로 인천지역에서 공연됐지만, 아직 부족한 감이 있다.

●조창완

미디어오늘 등에서 기자로, 차이나리뷰에서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는 IT회사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에서 디지털헬스케어, 스마트에듀 담당 상무로 일한다. 새만금개발청에서 전문공무원. 보성그룹에서 마케팅담당 상무, 춘천시 시민소통담당관 경력이 있다. <달콤한 중국> 등 12권의 중국 관련 책을 썼고, <신중년이 온다> 등 인문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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