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누가 훈민정음(언문, 한글)을 창제했나?
상태바
2. 누가 훈민정음(언문, 한글)을 창제했나?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1.26 13:1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종실록》에 세종의 새문자 창조 역사적 맥락 속속 드러나

지금도 훈민정음 관련 대중 강연에서 훈민정음 세종 단독 창제와 집현전 학사와의 공동 창제에 대한 현장 여론조사를 해보면 평균 70%는 공동 창제 쪽이다. 국어 전문가들조차 그러하다. 필자와 같은 학자들의 학술 노력과 한글 단체들의 운동으로 모든 교과서가 단독 창제로 수정이 되었음에도 일반 여론은 좀처럼 바뀌질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세종 단독 창제에 대한 명백한 기록이 실려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세종실록을 제대로 안 읽었거나 읽었어도 무시해서 그렇다. 둘째는 설마 그런 위대한 문자를 세종 혼자서 했겠느냐는 선입견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누가 창제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는 세종의 존숭 차원이 아니라 역사의 사실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이고 또한 훈민정음에 얽힌 각종 문제를 풀어내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28자는 당연히 세종이 단독으로 창제하여 1443년(세종 25년) 음력 12월(현행 그레고리력 양력 1443.12.30.-1444.1.28.)에 신하들에게 알리고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446.9.30.-1446.10.9.)에 모든 백성들에게 알린 글자다.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맥락. @김슬옹 글 강수현 그림<누구나 알아야 할 훈민정음, 한글 이야기 28>

세종은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내면서 개혁적인 미래상을 가진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도 구상부터 이론 정립에 이르기까지 세종이 친히 모든 과정을 혼자 이뤄냈다는 단독 창제를 부정하는 공동 창제설, 집현전 학사들의 협찬설, 산스크리트 문자와 파스파문자 모방설, 가림토 문자설 등을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 기록과 일반 상식을 무시한 결과다.

세종 단독 창제에 관한
각종 기록과 증언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혼자서 비밀리에 창제한 문자다. 양반 사대부들에게 한자는 목숨이요 권력이었다.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 과정은 공개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고 양반 사대부들은 공동 창제자가 될 수 없었다. 비밀리에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은 1443년 12월(음력)에야 이 사실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창제 후 반포를 위해 펴낸 해례본 저술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함께한 것은 그나마 기적이었지만,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학문 저술용으로든 실용 목적으로는 훈민정음을 주류 문자로는 쓰지 않는다.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직접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 ‘정음 취지문’(어제 서문)에서 자신이 창제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 모르는 백성이 말하려는 것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음 취지문(어제 서문).

한문은 54자의 짧은 글이지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뚜렷한 동기와 목표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책을 읽지 않거나 공부하지 않는 것을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겼다. 하지만 책은 10년 이상 배워야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는 한자로 쓰여 있었다. 이를 가엾게 여긴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직접 28자의 기본 글자를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히고 편히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이 만든 글자가 한자를 배운 양반들에게도 요긴한 글자임을 밝힌 것이다.

이번에는 신하들의 증언을 살펴보자.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서’에서 세종 친아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9월 29일 자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계해년 겨울(1443년 12월)에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설명한 ‘예의’를 들어 보여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상형’ 원리로 만들어 글자는 옛 ‘전서체’를 닮았으되, 말소리에 따라 만들어 소리는 음률의 일곱 가락에도 들어맞는다. 하늘·땅·사람의 세 바탕 뜻과 음양 기운의 신묘함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덟 자로 끝없이 바꿀 수 있어,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정밀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할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1446) ‘정인지서’

간략한 기록임에도 당시 정황의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세종은 비밀 연구 끝에 1443년 12월이 되어서야 집현전 일부 신하들에게 28자를 만든 과정과 발음하고 쓰는 방법을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한 듯하다. 특히 ‘우리 전하’라는 말은 새 문자를 창제한 주체가 세종 한 사람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짧은 구절이지만 창제 주체와 훈민정음의 주요 특징, 우수성을 명확하게 알리고 있다.해례본 ‘제자해’에서도 세종 친제에 대한 존경심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 정음이 만들어져 천지 만물의 이치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그 정음이 신묘하다. 이는 틀림없이 하늘이 성왕(세종)의 마음을 일깨워, 세종의 손을 빌려 정음을 만들게 한 것이로구나!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하늘의 뜻에 따라 또는 하늘이 내린 능력으로 세종이 천지 만물의 이치가 담긴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뒤이어 정인지 서문에서도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업적이 모든 왕을 뛰어넘으셨다.(恭惟我殿下, 天縱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라고 세종의 놀라운 능력을 언급한다. ‘하늘이 내린 성인’, ‘모든 왕을 뛰어넘으셨다.’라는 표현은 보통은 중국 황제에게 쓰는 표현인데도 과감히 쓰고 있다.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의 상소문에서조차 이런 찬사가 쏟아진다. 

신 등이 엎디어 보건대, 언문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임금께서)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 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이 상소문은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공표한 지 얼마 안 돼 접수된 것으로, 한편으로 반대는 하면서도 훈민정음이 임금(세종)의 신기한 창조물임을 인정하고 있다.

단독 창제의 역사적 정황들

세종이 창제자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도 있다. 《세종실록》은 세종이 새 문자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세종 나이 30세 때인 1426년(세종 8), 창제 17년 전부터 중요한 법률서가 양반 문신들조차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음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6년 전, 창제 9년 전에 다음과 같은 고민을 남겼다.

비록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률문에 따라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저지른 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법률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년) 11월 7일

책을 통한 교화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기 11년 전인 1432년에 더 쉬운 문자로 책을 펴낼 방법을 고민했다. 1434년에는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배려해 만화를 곁들인 《삼강행실도》라는 책까지 펴냈다. 한자의 모순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두(吏讀, 한문을 우리 식으로 고친 표기체)건 만화를 함께 그려 넣은 책이건 문제가 많다 보니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종대왕 독서기록화(김학수 화백. 1990작)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책을 워낙 좋아하다 보닌 한문의 어려움을 주목하고 새문자를 구상하게 된 세종.

훈민정음이 비밀리에 창제되었다 보니, 그 주체가 임금이 될 수밖에 없는 정황 근거도 있다. 만일 한글 창제가 공동 연구의 결과라면 이는 비밀 연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된다. 우리말을 적기에 쉬운 문자를 만들어 백성의 교화에 대한 세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1432년과 1434년 기록과 그 이후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가 1443년 12월이 되어서야 창제 사실이 드러난 점 등은 훈민정음이 철저하게 비밀리에 창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대부들의 반발과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연구였기에 세종은 비밀리에 문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강력한 창제 의지와 그것을 떠받들 수 있는 뛰어난 지식과 아이디어가 함께해야만 가능했기에, 한글 창제는 임금이 단독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을 보면 집현전 학자들 일부만이 창제 후 도왔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드디어 전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상세한 풀이를 더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도록 명령하시었다.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 최항과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와 수찬 성삼문과 돈녕부 주부 강희안과 행 집현전 부수찬 이개와 이선로 등과 더불어 삼가 여러 가지 풀이와 보기를 지어 그 대강을 서술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신숙주, 성삼문이 한자음 연구를 위해 중국 음운학자 황찬의 자문을 구한 것도 창제 이후의 일이다.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과 행사용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5년(세종 27년) 1월 7일

하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발명할 수 있는 사람은 세종이 유일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에 담긴 융합 사상을 두루 갖추고 그것을 추진할 권력을 가진 사람은 세종 외에는 없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수학과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음성학과 문자학, 여기에 음양오행과 천지인 삼조화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학문 체계로 보면, 보편 과학 중심의 근대 학문과 차이 중심의 탈근대 학문을 융합하여 가져온 문자혁명이었다. 지식을 평등하게 나눌 수 있게 한,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는 참다운 지혜의 세상을 열게 한, 인류문명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대사건이었다. 신하들은 이런 놀라운 문자를 직접 창제한 세종과 훈민정음 반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무릇,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는 큰 지혜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음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물론 세종은 임금으로서 집현전과 같은 훌륭한 연구소, 그리고 세종과 뜻을 함께하는 많은 인재들의 간접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세종이 아무리 대천재라도 임금 자리에 없었다면 훈민정음 창제 보급은 불가능했다. 세종의 단독 창제를 강조한다고 해서 이런 역사적 정황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훈민정음 탄생과 보급은 언어학과 음악, 철학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잘 알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천재적 학문 능력과 거대한 중화 사대주의적 한자 권력을 막아내고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군주의 권력과의 융합이 절대적이었다. <다음호에 이어 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상기 2024-01-31 12:53:33
세종대왕은 참으로 개혁적인 군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막힘 없이 두루 통하시고,
사람을 비롯해 세상 모든 것을 하늘이라
여기시고 소중하게 여기셨던 애뜻한
성군의 마음이, 한글을 공부하면 할 수록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한글과 같은 문자를
만드셨을까 참으로 신기합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