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다비드」와 정치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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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다비드」와 정치 현수막
  • 김송이 아트큐레이터, ㈜일상예술 대표
  • 승인 2024.02.0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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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총선을 앞둔 예비후보들의 각축전이 한참이다.

여기저기 현수막이 걸리고 주요 거리에서는 예비후보들의 아침 인사를 마주하게 된다. 냉기로 가득한 대기가 공격적으로 느껴질 텐데 차 안에서 보는 그들의 모습은 사뭇 평온하다.

그네들이 동장군에게 당당히 맞서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정치인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국민이 주신 권한’이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사용하는 게 요즘 정치의 세태다. 국민이 준 권한이라면 제대로 국민들의 삶을 공유해야 할 텐데 여태 그런 모습의 정치인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또 바보처럼 반드시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정치인이 등장할 거라고 믿어보는 게 국민의 순진한 마음이다.

과거로 회귀해 1700년대 후반 프랑스 정치사를 들여다 보자. 당시 프랑스는 시민의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파리 전체를 흔들던 때였다. 이는 당시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화필로 정치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년 작품.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1년 작품.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프랑스 파리-벨기에 브뤼셀)라는 사람이다.

그는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파리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삼촌이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미술학교에 입학시켰다. 그의 그림 솜씨는 권력가들에게 바로 소문이 났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공포정치로 유명한 로베스피에르의 총애를 얻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아니면 다비드 자신이 정치에 뜻이 있었을까. 로베스피에르의 홍보 도구가 되어 정치 홍보용 작품들을 그리며 차츰 정치에 깊게 관여하게 됐다. 왕정에 불만이 가득했던 시민들이 점점 한목소리를 내면서 혁명은 불꽃처럼 일어났다. 바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발로(發露) 역할을 하게 됐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직접 혁명과 관련된 작품을 그려낸 것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마라의 죽음’이었다. 이 두 작품은 지금의 홍보 포스터 역할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혁명의 이유와 혁명의 폭력성을 매우 자연스럽게 국민들에게 흡수시켰다.

이런 절묘한 홍보 포스터용 작품들로 혁명에 불을 지핀 다비드의 작품은 로베스피에르를 정치인으로서 확고한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다비드의 홍보 포스터가 완성한 첫 번째 인물이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러나 그는 오래가지 못했다. 반대파의 쿠데타로 단두대에 목을 내놓는 불운을 맞았다. 다비드 역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로베스피에르 편에 서서 내내 홍보 포스터용 작품을 제작한 혐의를 받으면서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단두대에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자신은 단지 화가라며 로베스피에르 편임을 극구 부인했다. 그래서 겨우 단두대에 오르는 불운을 면하게 됐다. 이후 사면돼 일상으로 복귀했고, 다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후학을 기르는 데 힘쓰겠다는 다짐과 함께 훌륭히 스승으로서, 화가로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의 명성은 금세 프랑스 전역에 퍼졌다. 조용히 일상을 평온하게 지내던 그에게 다시 한번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에 그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 의뢰자를 어떻게 기억하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그건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랬다면 지금 보는 그림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혁명 이후에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된 인물이다. 물론 나중에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관식을 가졌다.

우리가 나폴레옹!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 있다. 누구의 작품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이 작품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 같다. 한때 초등학교 참고서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었던 적도 있다. 참고서 이름 역시 ‘완전정복’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정신을 계승해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왕이 아닌 통령으로 집권했다. 그가 통령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보 포스터용 작품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었다. 1801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이탈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그려 넣은 포스터다. 나폴레옹이 타고 있는 말은 단숨에 알프스를 넘을 듯한 모습이다. 그런 말발굽 아래 바위에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는 다비드의 절묘한 한 수로 꼽힌다.

세 사람의 이름은 알프스를 넘은 위대한 영웅 한니발과 샤를마뉴 대제,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이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그의 명언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로 점철된다.

나폴레옹 사전에 불가능을 없애 주려고 자크 루이 다비드는 그의 아래에서 궁중화가로 일하게 됐다. 그리고 나폴레옹 우상화에 열정을 보여줬다. 결국 정치의 권력을 따라다닌 행적을 볼 때, 그의 작품을 두고 정치 홍보 포스터 전문가로 인정했을 듯하다. 그렇지만 다비드의 작품이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이미지를 확고하게 한 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화가의 붓은 이렇게 한 인물을 영웅으로 완성시키기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혁명의 불을 지피기도 한다.

나폴레옹도 처음에는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보다 시민들의 권익을 더 생각했을까에 의문문을 가져본다. 베토벤이 그의 영웅적인 모습에 반해서 작품을 썼다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는 일화는 일반인으로서 부질없는 일에 회한을 갖게 만든다.

거리를 채운 정치 현수막들 속 인물들이 부디 시민들을 위한 바른 정치인이 되기를 바라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비유로 적어 봤다.

다비드가 현재 곳곳에 걸려있는 정치 현수막들을 본다면 뭐라했을지 궁금하다.
 


 

김송이 :

아트큐레이터. 명화와 클래식 음악 해설가이며 아트인문학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주식회사 일상예술 대표이자 수암골 네오아트센터 기획팀장으로 지역사회의 문화예술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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