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최만리 등 반대 상소의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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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최만리 등 반대 상소의 영향력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2.22 16: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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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훈민정음 반포‧보급’에 큰 공헌

세종은 1443년 12월(음력)에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공포하자마자 급히 보급을 위한 정책을 서두른다. 대민 업무가 많은 하급 관리인 서리들을 가르쳐 익히게 하는 한편 중국 황제가 정한 한자 운서(한자 발음 사전)까지도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적게 하는 등(1444.2.16) 신하들과 상의도 없이 급히 서둘렀다. 창제 공표 당시 우리말의 모든 것, 곧 순우리말이든 한자어든 마음껏 적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을 넘어 아예 보급을 위한 예비 정책을 서두른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 자체가 못마땅했던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7명도 급히 회합을 갖고 대책 논의를 거친 뒤 1444년 2월 20일에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당시 용어로는 언문 반대 상소였다. 《세종실록》 1444년 2월 20일 자에 그 상소문 전문과 이 상소로 인한 세종과의 토론, 처결 내용 등이 상세히 실려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상소문이 받아들여졌다면 훈민정음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상소 후 정확히 2년 5개월쯤 뒤에 “훈민정음” 해례본(1446년 9월 상순)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해례본은 반대 상소에 대한 세종의 학술적 답변서였고 그 답변서는 온 나라에 훈민정음을 제대로 알린 공표문이었고 양반들 설득에 성공하여 이후로는 단 한 건의 반대 상소도 올라오지 않았고 훈민정음 보급에 성공하게 된다.

반대 상소문, 역사적 의미 담겨

이렇게 보면 집현전 학사 7인이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을 반대했다고 지금 시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7인의 생각은 그 당시 양반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해례본 간행과 훈민정음 보급에 간접적인 공헌을 한 해례본이 훈민정음 보급에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인해 언해본이 나올 수 있고 언해본으로 인해 온 나라 보급에 성공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 반대 상소 상상도.   /세종국어문화원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한자, 한문은 목숨이었고 신분 특권의 실질적인 기호였다. 18-19세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조차 훈민정음 사용 자체를 거부하다시피 했고 조선 말까지 지배층은 훈민정음을 주류 문자로 쓰지 않았는데 15세기, 창제 직후에 반대했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었다.

흔히 반대 상소를 올린 7인이 집현전의 보수적인 원로들이라 알고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출생 연도가 분명하지 않은 최만리와 김문은 1444년 무렵 40대 후반으로 추정되고, 신석조(1407-1459)는 37세, 정창손(1402-1487)은 42세, 하위지(1412-1456)는 32세, 조근(1417-1475)은 27세, 송처검 나이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보면 20대부터 40대까지 두루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단순한 보수파가 아니라 그 당시 양반 사대부들을 대표한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집현전의 다른 7학사(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은 나중에 집현전 학사가 됨)가 세종을 적극적으로 도와 해례본 집필에 참여한 것 자체가 예외적인 현상으로 지금으로 보면 기적이었다.

반대 상소문을 보면 이들이 훈민정음의 과학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소문은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언문(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지혜를 나타냄이 저 멀리 아득한 옛것으로부터 나온 것을 알겠습니다.”라고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는 중국을 떠받드는 사대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오랑캐나 하는 일이라 여겼다. 세종대왕도 중국에 대한 정치적 사대주의는 인정했다. 다만 따라야 할 것은 따르되 우리의 것을 지켜 나가자는 입장이었다.

둘째, 훈민정음이 학문을 정진하는 데 오히려 손해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주류 학문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한문으로 해야만 진정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종은 언문(훈민정음)이 학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그보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다.

셋째, 억울한 죄인이 생기는 것은 죄인을 다루는 관리가 공평하지 못한 탓이지 죄인들이 문자를 몰라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 억울한 죄인을 구제하고 교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세종과 최만리는 이 상소문을 계기로 역사에 명 논쟁을 남겼다. 상소문과 논쟁 과정이 고스란히 《세종실록》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세종은 이들에 대한 설득이 안 되자 하루 동안 가두기까지 한다. 하루 만에 풀어 주었지만 끝내 정창손은 파직을 당하고 김문은 매우 심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 보급에 얼마나 대단한 의지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다.

반대 상소의 대표자인 최만리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청백리였음에도 상소문만으로 오늘날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그보다는 비판이나 비난의 근거나 되는 상소문의 맥락을 제대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최만리, 역사적 명 논쟁

반대 상소문은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복합 문헌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 준다. 그 가치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상소문의 맥락과 뜻을 제대로 드러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반대 상소로 인해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훈민정음 창제 후 찬반으로 갈라진 양반 사대부들 상상도.    /세종국어문화원

첫째, 훈민정음 세종 친제를 명확히 뒷받침한다. 상소문에 첫머리에서 ‘언문(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 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둘째, 언문 창제를 알린 뒤 과감하게 속전속결로 반포 작업을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1444년 2월 16일, 언문을 반포하기도 전에 운회 번역(운회에 수록된 한자에 대한 주음)을 지시했다는 것은 새 문자에 대한 자신감인 동시에 반포를 위한 임상실험을 서둘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하급 관리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쳐 가능한 한 빨리 새 문자가 퍼지도록 치밀한 전략을 쓴 듯하다. 하급 관리들은 행정 언어로 이두를 많이 썼는데 이러한 이두의 불편함과 비효율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 문자 보급이 시급했다. 반대 상소에서 언급한 다음 내용도 세종이 훈민정음 반포를 위해 얼마나 온 힘을 기울였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번 청주(초정) 약수터로 행차하시는데 흉년인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호종(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는 일)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날에 비교하오면 열에 여덟아홉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 보고해야 할 업무까지도 의정부에 맡기시면서, 언문 같은 것은 나라에서 꼭 제 기한 안에 시급하게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임시 처소에서 서둘러 만듦으로써 전하의 몸조리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그 옳음을 더욱 알지 못하겠나이다.”

최만리 등 7인 반대 상소문(1444.2.20)

세종이 각종 질환으로 병상에 누운 것은 1436년(세종 18년)으로, 세자인 이향(문종)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었다. 이듬해 세종은 세자에게 서무(일반 사무)를 결재하게 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도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인 1442년 세자가 섭정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에게 결재하도록 했다.

청주 약수터 행차에도 연구 몰입

이러한 과정에서 의정부 서사제(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의정부의 삼정승이 의논한 다음 왕에게 보고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왕의 권한을 대폭 의정부에 이양했다. 건강 탓도 있지만, 훈민정음 반포를 위한 연구에 몰입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숨 가쁜 역사의 맥락이 반대 상소로 인해 드러난 것이다.

셋째, 반대 상소로 인해 반포를 위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집필과 보완이 훨씬 늦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판각수 장인 수십 명이 반포를 위해 판각하려던 것은 아마도 《훈민정음》 해례본이 아니라 세종이 직접 쓴 ‘정음편’이었을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 훈민정음을 반포하려다 사대부들을 제대로 설득하기 위해 해례본을 반포하기로 결정한 듯싶다. 결국 반대 상소 때문에 ‘해례’ 부분의 집필에 총력을 기울이게 됐고, 결과적으로 반포를 늦췄을 것이다.

넷째, 반대 상소의 영향으로 세종 어제 서문을 대폭 보완하고 상세하게 설명한 정인지 서문이 기술되었을 것이다.

다섯째, 세종이 한글 창제 사실을 공표한 뒤 여러모로 사대부들을 설득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다음 기록은 1443년 12월부터 1444년 2월까지 《세종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아마도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죄인을 심문하거나 심의를 해주는 사이에 억울하게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아는 자가 직접 공술문을 읽고서 그것이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거짓말로 자복하는 자가 많사옵니다. 이런 경우는 공술문의 뜻을 알지 못해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비록 언문을 쓴다고 할지라도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범죄 사건을 공평히 처결하고 못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리가 어떤가에 달려 있으며 말과 글이 같고 같지 않은 데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언문을 사용해야 처결 문건을 공평하게 할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신 등은 그것이 옳다고 보지 않사옵니다.”

최만리 등 7인 반대 상소문(1444.2.20)

이 같은 기록은 《세종실록》 외에는 없어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이 이 기록을 통해 드러났다. 하층민과의 소통 문제가 그것이다.

이같은 맥락으로 볼 때 최만리 등 7인의 언문 반대 상소문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훈민정음 찬반 의견에 대한 단순한 기록으로 볼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고 기록이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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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자 2024-02-24 10:47:04
이 기사를 읽고 지도자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네요. 한글의 필요성을 절실히 여겼기 때문에 신하들의 반대 상소에도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고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진행하셨고, 지위를 이용한 우격다짐이 아닌 해례본으로 논리적인 답변을 함으로써 더 이상의 반박이 생기기 않도록 한 것을 보면서 세종대왕의 위대한 면모를 또한 번 느끼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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