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충의록, 안중근 의사 공판기록 넘는 특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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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충의록, 안중근 의사 공판기록 넘는 특별 의미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4.02.2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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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소설 형식의 한글 필사본
이토 저격 순간과 생애 등도 담겨

독립운동에 목숨 바친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중국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켜 그의 숨통을 끊었다. 총격 후 체포될 때 큰 소리로 국제사회를 향해 “코레아후라(大韓萬歲)!!”를 세 번 외쳤다. 이듬해 2월 안 의사는 뤼순(旅順‧여순)에서 거의 매일같이 재판을 받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재판 내용을 한글 필사본으로 제작한 최고(最古)의 <大韓忠義錄(대한충의록)>이란 단행본이 충주 ‘우리한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2022년 8월 이 자료를 분석해 <안중근 공판기록 한글필사본 ‘大韓忠義錄’의 자료적 성격과 특징>이란 특별한 논문도 발표됐다. 대한충의록은 기사문과 달리 전기소설 형식으로 저격 순간 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대들의 목숨 바친 독립운동이 꺼지지 않는 들불처럼 이어져 해방을 이룬 것이다.

안중근 의사 공판기록의 한글 필사본 <대한충의록>. 충주 우리한글박물관 소장.

안중근 의사는 지금부터 115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아침,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빼앗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단지(斷指)를 한 안 의사는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켜 그의 숨통을 끊었다. 총격 후 체포될 때 그는 큰 소리로 국제사회를 향해 “코레아후라(大韓萬歲)!!”를 세 번 외쳤다.

이듬해 2월 안 의사는 뤼순(旅順‧여순)에서 거의 매일같이 재판을 받았다. 이런 재판 과정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신문에 게재돼 기록으로 남았다. 이 기사를 한글 필사본으로 제작한 것이 <大韓忠義錄(대한충의록)>이란 단행본이다. 이 책자가 충주 ‘우리한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상석 우리한글박물관 관장은 “아직까지 이 한글 필사본은 유일하다”면서 “기사를 필사한 것이지만 전기 소설적 형식으로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우리한글박물관은 5년 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보라! 태극기와 애국지사들’ 특별전을 통해 ‘대한충의록(大韓忠義錄)’을 공개해 잠시 눈길을 끌었다. 안중근 의사 재판기록을 한글 필사본으로 만든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란 점에서다. 이를 알게 된 선문대학교 김영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연구 부교수)은 2022년 8월 이 자료를 분석해 <안중근 공판기록 한글필사본 ‘大韓忠義錄’의 자료적 성격과 특징>이란 논문을 인문사회21 제13권4호에 발표했다. 이 내용의 보도는 충청리뷰가 처음이다.

김영 소장이 분석해 밝힌 논문에 따르면 서명의 ‘大韓’은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듯하다. ‘大韓忠義錄’은 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던 충성되고 의로운 인물의 행적을 적어 놓은 책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된다. 그 충의로운 인물이 ‘안중근’이다.

우리한글박물관이 소장

이 책의 처음은 ‘각셜 한국셔 황도 쥬 의 한 람이 잇스니 셩은 안니오 일홈은 즁근이라’로 시작한다. 즉, 주인공 안중근의 출생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여슌에 졔일ᄎᆞ 면회 통신’이라 하여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와 동일한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나 목차명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도입부분은 1면~8면으로 소제목 없이 안중근의 출생, 안중근이 난세에 처한 국가를 걱정하여 애국의 마음으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내용, 그리고 안중근의 소식을 접한 후 모친 조씨(조마리아)가 아들 안정근, 안공근 그리고 변호사 안병찬과 함께 하얼빈으로 건너가는 과정까지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안중근 의사 원본 사진. 충주 우리한글박물관 소장.

바로 이어서 안중근과의 면회, 6일간의 공판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 부분이 책의 주요 내용으로 8면부터 85면까지가 해당된다. ‘여슌에 졔일ᄎᆞ 면회통신’은 1910년 2월 1일 동생 안정근, 안공근과 변호사 안병찬이 안중근을 면회하는 내용이다. ‘여슌에 졔이 통신’은 변호사 안병찬이 변호를 맡지 못해 분개하여 피를 토하는 사건, 안중근 공판에 대한 개괄,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이유, 안중근이 면회에서 두 동생에게 부탁하는 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ᄀᆡᄌᆡ판 졔일일’부터 ‘공ᄀᆡᄌᆡ판 졔뉵일’은 1910년 2월 7일~14일에 진행된 안중근의 공개 재판에 대한 내용이다. ‘여슌 방쳥ᄉᆡᆼ 샹보, 샹보(쇽), 별보’는 안중근과 우덕순의 공판 심문에 대한 진술 내용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책이 완성된 후의 이야기로 85면부터 90면까지이다. 책을 쓰게 된 경위와 책에 대한 평가 등을 적고 있다. ‘大韓忠義錄’을 완성한 청학동에 사는 80이 넘은 老處士가 백운동에 사는 학선도사를 찾아가 책을 보여주고 책에 대한 평가를 내려줄 것을 부탁한다. 노처사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학선도사는 책을 읽고 안중근의 애국충절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끝마치고 있다.

이토 저격 순간을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에 “翌日七時(卽暗殺當日)에 합爾賓에 到야 驛內食堂에셔 茶를 飮면셔 伊藤의 來를 待다가 因야 俄國軍隊整列의 後面으로 出야 伊藤이 下車야 自己의 前面으로 數三步 行過야 十步相距의 地에 在 時에 發砲엿 自己 元來伊藤의 面目을 不知나 嘗히 新聞上에셔 其寫眞을 見하엿고 且現場에셔 卽軍服을 着지 안코 平服을 着 것과 又老人인 것으로 伊藤을 推定고 發砲엿스며 就縛의 際에 世界通行語로써 코레아후라(大韓萬歲)를 三唱 事實이 有며 ……”라고 실었다.

김영 교수 “소절적 의미 커”

이를 필사본인 대한충의록은 “이튼날 칠시에 역 식당에 가셔 을 마시면셔 이등의 오기을 기리다가 인야 아라 국군 뎡열 후면으로 나셔 마음을 소을느고 눈을 굴이여 피니 이등이가 에 나리여 본인 압흐로 슈 보 동안이나 되는 데로 거러 지나가는지라. 이을 당야 다시 몸을 송글치고 이을 붓셕 갈고 열 름 상거가 되는 단총을 연발얏스며 본인이 원 이등의 면목을 아지 못나 일즉이 신문상에셔 그 진을 보왓고  이 당장에셔는 이등이가 군복을 입지 안코 평복을 입엇는 늘근 람으로만 본인이 인뎡고 관총을 연발얏스며 당장 잡피여 포승을 바들  이에 크게 소 질너 한만셰라 셰 번을 불너스며 ……”(大韓忠義錄, 27-28)로 적고 있다.

대한충의록은 이렇게 전기소설 형식으로 저격 순간 등을 생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영 선문대 교수(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는 “여성 등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전기소설 형식의 한글 필사본을 만든 것 같다”면서 "지금 읽어도 안 의사 애국의 심장소리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소설이란 점에서 논의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안중근 의사 등 선대들의 목숨 바친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이어져 해방이 왔다는 것을 상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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