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을 도운 '신하와 왕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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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을 도운 '신하와 왕족들'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2.29 15:4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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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연구‧반포‧보급'에 공로자...양반 사대부 신하와 왕실 가족들

세종의 훈민정음 보급 정책은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공포한 1443년 음력 12월 이후에는 공개로 전환돼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각종 기록으로 드러난 세종을 도운 이들은 양반 사대부 신하들과 왕족으로 나눌 수 있다.

양반 사대부는 두 부류로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 저술에 참여한 8인(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선로, 이개)과 훈민정음 보급 관련 문헌 저술에만 참여하는 8인(손수산, 조변안, 김증, 권제, 안지, 신영손, 김하, 이변) 등 16명이다. 왕족으로는 세자 이향, 진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향, 화의군 이영, 계양군 이증, 정의공주 등 6명이다.

이밖에 공식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글 불경서인 석보상절(1447), 월인천강지곡(1448) 저술에는 불교계의 신미스님이 참여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세조가 이 두 책을 엮어 1459년에 '월인석보'를 펴내면서 서문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의심 나는 곳이 있으면 반듯이 박식한 사람에게 자문했는데 첫 번째로 신미스님을 들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1443년 음력 12월에 공포했을 때 사대부들의 반응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사관의 담담한 기록이 12월 30일 자 세종실록에 전할 뿐이다. 첫 공식 반응은 1444년 2월 16일 실록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8대 공신 인물화(윗줄 왼쪽부터: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세종국어문화원

세종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에게 중국 운서 책인 ≪운회(韻會)≫의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달게 했다. 이에 대한 감독은 왕실 가족인 동궁 이향과 진안대군(수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에게 맡겼다. 이들이 일을 잘해 상을 후하게 받았다고 하니 세종의 훈민정음을 적극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참여한 사대부 6인에다 정인지, 성삼문 등이 추가로 함께해 모두 8인이 1446년에 완성되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참여했다. 이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8공신이다.

사대부 신하 공로자
박팽년‧신숙주‧권제‧김하 등

해례본 8공신 가운데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 저술에서 맡은 역할이 가장 분명하다. 신하 측 총책임자이자 해례본 맨 뒤에 실린, 지금으로 보면 꼬리말(에필로그)을 실명으로 실었기 때문이다. ‘정인지서’는 세종 서문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해례본 작성에 대한 경위까지 포괄하는 내용으로 훈민정음의 진정한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정인지는 역사, 천문, 음악 등에도 재주가 뛰어나 융합 연구서이기도 한 훈민정음 해례본 작성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가장 큰 역할을 한 공신은 신숙주였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해례본 8공신으로 ≪동국정운≫을 대표 저술했고 머리말에서 “성운(글자의 소리)은 곧 훌륭한 사람의 길을 배우는 시작이다. 이리하여 우리 임금 세종께서 말소리에 마음을 두시고 고금의 모든 것을 두루 살피시고 지침이 될 만한 훈민정음을 만드시어 수억 년 동안 어리석게 살아온 자들을 깨우치셨다.”라고 말했다.

≪동국정운≫은 이상적인 한국 한자음의 표준을 적은 책인 만큼 그것을 펴낸 사실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신숙주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에도 뛰어나 훈민정음 및 한자음의 연구와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용비어천가≫(1447) 저술과 중국 운서에 훈민정음으로 음을 단 ≪홍무정운역훈≫(1455) 사업과 외국어 학습에 훈민정음을 적용한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연도 모름)에도 참여했다.

훈민정음 보급 관련 사업 주요 참여자.

언문(훈민정음) 창제 당시인 1443년에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은 갓 벼슬살이를 시작한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엄밀히 말해 창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박팽년의 7대손인 박숭고(朴崇古)[1615(광해군 7)〜1671(현종 12)]가 1658년(효종 9)경에 발간한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에 따르면, 창제 1년 전인 1442년에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석형, 하위지 등은 사가독서 연구자로 뽑혔다.

이들은 서울시 은평구 삼각산(북한산)에 있는 진관사에서 공부했는데 이 중 네 명(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은 창제 직후의 훈민정음 사업(운회 번역, 1444.2.16.)과 “훈민정음” 해례본 저술에 참여했다. 따라서 창제 마무리 비밀 작업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들은 신진 학자를 관리하고자 했던 세종의 뜻에 따라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위한 엄청난 사업에 이들이 발탁된 것이다.

해례본 저술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조변안과 김증은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한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 저술과 훈민정음으로 중국을 배우는 학습서인 '직해동자습' 저술에 참여했다. 동시통역사이기도 했던 손수산은 '홍무정운역훈'과 '직해동자습' 저술에 참여했다. 권제 안지, 신영손은 최초 훈민정음 표기 적용 문헌인 용비어천가(1447) 저술에, 김하와 이변은 '직해동자습'에 참여했다. 해례본 8공신은 '용비어천가' 저술에도 모두 참여했다.

왕족 가운데는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향(문종), 이유(세조), 이용(안평대군) 세 왕자와 정의공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종은 자신의 두 동생(이유, 이용)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 집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운회≫의 번역을 진두지휘했다. 또한 왕세자들의 교육을 일컫는 서연에서 언문(훈민정음)을 강목으로 내세워 신하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토론하고 연구했다.

왕실의 공로자 
문종‧정의공주‧세조 등

반포 후에는 훈민정음의 지속적인 연구와 보급 정책에 관여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 최만리 등 7인이 올린 반대 상소에도 왕세자가 연구에 많은 구실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세조는 세자 시절에는 왕세자 형인 이향과 함께 ≪운회≫ 번역 일을 감독하며 최초의 훈민정음 산문집인 ≪석보상절≫(1447)을 직접 집필했다. 왕이 되어서는 자신의 저서와 부왕이 집필한 ≪월인천강지곡≫(1448)을 합치고, ≪석보상절≫의 권두에 붙였을 ≪훈민정음≫ 언해본을 ≪월인석보≫에도 붙여 펴냈다.

특히 과거 시험에 ‘훈민정음’이란 과목을 만들어 넣어 훈민정음이 더욱 널리 확산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세조는 임금이 된 지 6년째인 1460년에는 ≪훈민정음≫과 훈민정음 발음법을 담은 책 ≪동국정운≫과 훈민정음으로 중국 한자음의 발음을 적은 ≪홍무정운역훈≫을 과거 시험에 추가했다.

이때 예조의 신하들도 “≪훈민정음≫은 선왕께서 손수 지으신 책이요,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도 모두 선왕께서 직접 엮어 펴낸 책이라고 강조하며 과거 시험에 넣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당대 최고의 대학이었던 성균관의 공부 과목에도 넣었다.

안평대군 또한 ≪운회≫의 번역 및 감독에 참여하고, ≪훈민정음≫ 해례본 인쇄를 위한 글씨를 썼다고 하나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안평대군은 세종대왕 신도비의 글을 쓸 만큼 글씨와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정의공주는 문종의 동생이자 세조의 누나로 세종의 훈민정음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안타깝게도 나라의 공식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남아 있지 않다.

“훈민정음” 창제자 왕실 가족 공로 인물화(왼쪽부터: 세종대왕, 문종, 정의공주, 세조)       @세종국어문화원

다만 공주의 남편인 안맹담 집안에 내려오는 ≪죽산안씨대동보≫에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해 여러 대군에게 풀게 했으나 모두 풀지 못했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했으며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했다.(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라는 기록으로 훈민정음 연구에 큰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1443년 창제 전의 사건을 나중에 후일담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창제 공표 후에는 집현전의 뛰어난 음운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해 굳이 공주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세종은 창제 공표 전에는 비밀에 부쳐 은밀히 진행하되 운학(韻學, 한자의 음운 연구)적인 부분은 집현전 학사들의 고제(古制) 연구와 같은 자문을 구하거나 세자 이향, 둘째 아들 수양대군, 셋째 아들 안평대군, 그리고 정의공주가 실험이나 토론 상대가 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문자뿐 아니라 섬세한 발음의 음운학적 논의에 공주와 왕자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밖에도 신빈 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화의군 이영은 '직해동자습' 책임자 역할을 했고 신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계양군 이증은 '훈민정음역훈'과 '직해동자습' 작업에 함께했다.

왕자와 공주들이 부왕을 도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정통 양반 사대부였던 16인이 훈민정음 보급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는 기적에 가까웠다. 이들조차도 훈민정음을 학문과 실용의 주요 문자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훈민정음은 세상의 빛을 보았고 500년 이상의 비주류 문자의 서러움을 견딜 수 있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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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원 2024-03-06 19:34:31
가히 특공작전이라 할만한 신하와 왕족들이었네요. 6개 영역에서 공헌한 바를 정리한 표를 보고 그 협업의 형태를 감잡기 좋았습니다. 정성스런 글 감사합니다.

최정자 2024-03-06 19:15:23
위 기사내용을 보면 한글 창제 및 보급이 얼마나 큰 일 이었는지 다시금 실감합니다. 그리고 표에 각자 맡은 역할을 보면 참으로 조직적으로 진행이 되었구나 알 수 있네요. 세종대왕은 진두지휘 아래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역사적 사업 한글 창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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