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만필] 독립운동가의 생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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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만필] 독립운동가의 생을 보며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4.03.0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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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김천수
편집국장 김천수

3‧1절 105주년을 맞았다. 평소에는 마음을 두지 않다가 이 때쯤이거나 광복절이 오면 가끔은 기사를 작성하기 위한 편의적 생각에 독립운동가의 삶을 따라 나서는 게 겸연쩍다.

이번 삼일절에도 마판가지란 것을 숨길 수가 없다. 한글 필사본 <대한충의록>과 이와 관련한 논문을 통해 접한 안중근 의사의 나라를 구하기 위한 목숨 건 발걸음에 저절로 경의감이 우러나왔다. 30대 초반의 청년이 구국의 일념으로 단지(斷指) 동맹을 맺고 고국 침략의 원흉의 목숨을 빼앗아 나라를 되찾고자하는 오직 한 길. 그 길을 따라 가보자니 저절로 부끄러움을 감출길이 없다. 나라의 위기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온다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과연 지금이 위기의 순간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숙연해 진다.

충북의 사건‧단체 관련 독립운동가 36인의 삶을 공훈록을 통해 마났다. 한결같이 의병활동, 만세운동 등에 참여한 일반 소시민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어느 누구하나 옥고를 치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들은 그냥 시민이었고 국민이었다. 친일행각을 벌이지 않은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을까. 기록에 남은 선대의 이 목숨 바친 삶의 빚을 후대인 우리는 어찌 갚을 것인가.

감옥에서 숨져가거나 탈출하다가 일경의 총탄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되기 일쑤였다. 김재희 의병은 어떤가. 출생 시기와 출신지도 모른다. 충북 회인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성장과정은 물론 1907년 의병에 참여하기 전까지 행적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1907년 9월 또는 10월 단양에서 의병부대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본 군경을 상대로 항일 무장 투쟁을 수행하다가 안동수비대에 붙잡혀 1907년 11월 9일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총살됐다. 이 같은 사실은 1907년 일제의 김재희 총살 보고 문서에 의해 확인됐다.

김철수 선생은 옥천군 청산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청산시장은 보은군, 영동군 등에서도 장꾼들이 모이는 규모의 큰 장터였다.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인근 10리 내외의 7~8개 마을 청년들이 만세소리를 듣고 청산시장에서 합류했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대규모 만세시위에 일제 헌병들은 해산을 명령하면서 당시 청산면에 거주하던 5~6호의 일본인들을 청산주재소로 피신시켰다. 해산을 강요하는 일제 헌병에 대항해 청산주재소로 향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는 계속됐다. 이에 당황한 일제 헌병들은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이 때 김철수 선생은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부모와 형제,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부부도 있고, 모자도 있고, 부녀도, 모녀 간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청주에는 전국 유일의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이 있다. 이곳에는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10인의 흉상이 있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 느낄 수 있다.

이곳에는 오건해‧신순호 모녀 독립운동가와 어윤희 홀몸 독립운동가의 업적도 만날 수 있다. 오건해, 신순호 모두 독립운동가 가문과 결혼해 함께 그 길을 걸었다. 오건해와 남편 신건식은 중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오건해의 딸 신순호의 남편은 박영준이다. 이 사람 역시 광복군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다. 박영준은 “독립운동가 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만큼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에 힘썼다는 말이다. 신준호도 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했다.

어윤희 여사는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8세 때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16세에는 남편이 동학 의병으로 나가 전사했다. 문자 그대로 푸른 하늘아래 혈혈단신이 되었다. 여사가 사회의 모진파란 속에 휩쓸려 고생 많은 청춘을 보낸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43세 때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서울로부터 맡아다가 개성지국에 뿌리고 스스로 선두에서 서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에 잡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영어의 생활을 했다. 일본 경찰에 당한 어 여사의 심한 고문과 모욕은 당시 일본 경찰의 잔인성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특히 옥중에서 유관순 양과 같은 감방에 있었다. 어 여사는 이 민족의 독립과 수많은 애국자들의 분투를 위해 금식기도를 할 때마다 자기 몫의 밥을 유 양에게 먹였다.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도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격려해줬다.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목슴을 건 희생이 우리나라를 지금에 이르게 한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 속의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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