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처리 특례법, 의사 달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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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처리 특례법, 의사 달래기?
  • 박소담 기자
  • 승인 2024.03.0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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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 행위 중 환자 사망해도 ‘형 감면’
유례없는 특례법…정부 “전공의, 현장으로 돌아와 달라”

국민 찬성 의대 증원, 해결돼야

지난해 12월 보건의료노조가 발표한 국민 여론조사에서 대부분의 응답자(89.3%)가 의대 증원에 찬성했다. 국민 10명 중 9명이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찬성한다는 의미다. 지난 1년 사이 정부와 의사 단체 등이 참여한 의료현안협의체 회의가 27차에 걸쳐 진행됐지만 의사 단체의 의대 정원 확대 반대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의료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 등 4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를 발표했다. 이어 지난달 6일에는 각 의대의 증원 요청 수요조사를 근거로 2025학년도 의대 신입생을 2000명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후 전공의 집단 사직 등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전공의 1만여 명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의료인들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의사들의 의료사고 부담을 완화하는 ‘의료사고처리 특례법’ 제정안을 공개했다. 필수의료 분야에서 과실로 인한 환자 사망사고를 냈더라도 의료진이 종합보험에 가입했다면 형을 감면해 주는 것이 골자다. 전 세계에서 이 같은 법을 도입하는 것은 한국이 처음인 것으로 전해진다.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이란

지난달 27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이하 특례법) 제정안을 공개했다. 특례법안은 필수의료인력이 ‘책임보험‧공제’에 가입한 경우 △의료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의료 과실로 환자에게 상해 발생 시 환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공소 제기 불가 △의료인이 의료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의료 과실로 환자에게 상해 발생 시 공소 제기 불가(응급환자에 대한 의료행위, 중증질환, 분만 등 필수의료 행위 경우 환자에게 중상해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공소 제기 불가) △환자가 사망하게 되는 경우 형의 감면 적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의료인의 업무상 과실치상죄 또는 중과실치상죄는 다른 법률보다 우선 적용된다. 정부는 필수의료 분야와 전공의에 대해 ‘책임보험·공제’에 가입하는데 드는 보험료도 지원할 예정이다. 진료기록·폐쇄회로TV(CCTV) 위·변조, 의료분쟁 조정 거부, 환자 동의 없는 의료행위, 다른 부위 수술 등 ‘면책 제외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특례가 적용되지 않는다.

환자·소비자단체 ‘강력 반대’

특례법은 의료현장에서 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의료계가 지속해서 요구해온 법안이다. 이런 파격적인 특례법에 각계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백혈병환우회 등 9개 단체가 모인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4일 낸 성명문에서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에 반대하며 이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간 정부와 ‘의료분쟁 제도개선 협의체’에 참여해 온 한국환자단체연합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소비자공익네트워크 등 환자단체·소비자단체·시민단체 위원들도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발표 직후 유감을 표명하고 협의체 탈퇴를 선언했다. 이들 단체는 “정부가 소비자단체의 우려를 무시한 채 이번 정책패키지에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을 포함했다”며 “중‧상해뿐 아니라 사망 의료사고까지 형사책임 면제 범위에 포함하는 것은 환자권익을 무시하는 행동이다”고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환자단체들도 “사실상 의사들에 대한 특혜”라며 반발하고 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의료인이 종합보험에 가입하면 환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형사처분 공소 제기 자체를 못 하도록 했다. 애초 정부가 사망사고는 빼겠다고 하고선 필수의료라는 포괄적 범위에 적용해 형을 감면받을 수 있도록 했다”며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 안”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의료인 과실 입증 책임 또한 여전히 환자에게 있다. 과실 자체를 입증하지 못하면 배상받지 못하는 게 문제”라며 “위헌적이자 반 인권적 법안”이라고 지적했다.

“사고 입증 주체부터 바꿔야”

현행법상 의료진의 잘못을 입증하는 책임은 오롯이 환자에게 있다. 의료 소송에서 원고 승소율은 현저히 낮다. 진료기록에 접근하기도 어렵고 전문 지식도 부족한 탓에 환자가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2023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의료과오로 처리한 855건의 사건 중 원고가 승소한 경우는 단 1%(9건)였다. 의료진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원고일부승소’까지 포함해도 27%(233건)뿐이다. 의사의 면책 범위만 넓히면 재판청구권 등 환자의 피해구제 권리는 더 줄어들게 된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특례법 도입은 입증 책임 전환 규정과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밝혔다. 입증 주체를 바꾸지 않고 보험 가입만으로 의사의 처벌을 제한한다면 피해자 권리는 더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많다.

무분별한 의료 소송 부추길 수도

반면, 의사들은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한 것을 우려한다. 이미 대한의사협회가 운영하는 의료배상공제조합의 ‘의료사고배상 책임보험’이 존재한다. 하지만 의료인들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의료기관의 가입률이 저조하다. 실제로 현재 운영되고 있는 책임보험의 경우 의료기관 자기부담금, 보상한도액 등을 두고 있어 실제 의료사고 발생 시 효용성이 떨어진다. 특히 의료사고 위험이 높은 필수의료 분야 의료행위는 상대적으로 사고 발생률이 높고 건당 지급되는 손해배상금액도 높아 고액의 보험료와 낮은 보장률로 인해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다.

의료계 관계자는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할 경우 손해보험사는 손해율 급증 시 의무보험임을 악용해 급격한 보험료 인상, 보상기준 상향 및 보상항목 축소를 할 가능성이 크다”며 “의료사고 배상책임보험은 실제 위험을 담보할 수 있는 자기부담금 및 보상한도액 설정, 의료사고 발생 시 제한적 형사책임 면책규정 등 충분한 연구 개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청주 지역 4년차 개원의인 박 모씨는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은 표면상으로는 필수 진료과를 보호한다는 명분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의아한 점이 매우 많다”고 말했다. 또 “무조건적인 책임보험의 가입과 정부의 개입으로 무분별한 의료 소송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밝혔다.

환자권익 최우선 돼야

의료사고처리 특례법 제정은 의료계에 필수의료 서비스 제공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환자 단체에는 환자권익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 법안을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선 의료계와 환자단체, 정부의 적극적인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의료사고 발생 시 의료인의 법적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환자의 권익을 보호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료계‧환자 단체 간의 충분한 소통과 협의가 필요하다.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의 성공적인 제정과 시행을 위해서는 모든 이해당사자의 의견 반영 등 환자의 권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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