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훈민정음》 해례본의 놀라운 짜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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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훈민정음》 해례본의 놀라운 짜임새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3.14 11:03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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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인 다층 짜임새의 묘미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철저히 비밀리에 마무리한 뒤, 그것을 보급하기 위한 전략은 사대부들과의 공동 비밀 전략으로 추진했다. 그래서 창제 2년 9개월쯤 뒤에 나오는 책이 이른바 ‘≪훈민정음≫ 해례본(이하 <해례본>)’이다.

해례본은 한문으로 쓰인 새 문자 해설서이지만 단순 해설서가 아니라 문자학, 음성학, 문자교육학 이론서이자 실용서이기도 하고 문자 사상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학문적 융합 성격과 훈민정음을 백성의 문자, 천 년의 문자로 자리잡게 하기 위한 세종의 다중 전략이 책의 짜임새(체제, 구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흔히 ‘훈민정음 해례본’을 책 제목으로 알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한 표기법은 아니다. 책 제목은 문자 이름과 같은 ≪훈민정음≫으로 한자(訓民正音)로 쓰여 있다. 물론 1446년 당시 초간본이 책 표지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940년에 간송 전형필 선생이 소장한 간송본은 표지와 앞 두장 네 쪽은 원본이 아니다(나머지는 진본). 그럼에도 책 제목을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책 완성을 알리는 세종실록 1446년 9월 30일자 기록[訓民正音成]과 간송본의 책끄트머리 제목(권미제)에 따른 것이다. 옛날 책은 책 제목을 책앞 권수제(卷首題), 책끝 권미제(卷尾題)로 똑같이 적었다.

간송본 원본의 정음해례 29ㄴ(66쪽)의 책끄트머리 제목[권미제]                2023년 복간본 표지

일단 전체 장(張) 수와 문장 수가 예사롭지 않다. ‘장’은 그 당시 용어로는 ‘엽(葉)이라고도 하는데 해례본은 모두 33장(엽) 곧 66쪽의 단행본이다. 의도적으로 33 숫자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33은 문인 과거 급제자 수였고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새벽을 여는 종(파루/罷漏)의 수이기도 했다. 해례본의 문장 수는 대략 366문장 체제인데 고대 역학에서의 1년 길이인 366을 염두에 둔 듯하다.(나중 문장 해설에서 다시 설명, ≪훈민정음 해례본 입체강독본≫, 김슬옹, 박이정, 2023 참조) ‘대략’이란 표현을 쓴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순환구조 다원 체제

내용 체제는 저술 주체로 보면 2원 체제, 단계별 구성으로 보면 4원 체제, 전체 순환 구조로 보면 3원 체제로 되어 있다. 세종대왕이 직접 저술한 부분을 판심 제목에 따라 ‘정음(正音) 편’이라 부른다.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8명이 ‘정음 편’을 풀어쓴 부분을 역시 판심에 따라 ‘정음해례(正音解例) 편’이라 부른다. ‘정음 편’은 ‘예의 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음 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훈민정음≫ 해례본 짜임새, 김슬옹 글/강수현 그림, ≪ 누구나 알아야 할 훈민정음, 한글 이야기 28≫ 29쪽.

흔히 해례본은 세종을 비롯해 집현전 학사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함께 지었다고 하는데 엄격히 말하면 함께지은 것은 아니다. 8명이 쓴 ‘정음해례 편’은 세종의 ‘정음 편’ 또는 세종의 생각을 세종의 명에 따라 풀어쓴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보든 공동 저술인 것만은 분명하다.

공동 저술을 공동 창제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공동 저술은 그야말로 세종의 사려깊은 전략으로 신의 한수였다. 당시 사대부들을 대표하는 덕망 있는 인재들을 해례본 저술의 주체로 세움으로써 한자가 목숨이요 신분 그 자체였던 사대부들의 반발을 미리 막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기친람해야 하는 임금이었지만 집현전을 통해 키운 인재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맘껏 발휘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내용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자. 신하들이 쓴 해례 부분은 세종이 지은 ‘예의’ 부분을 자세히 풀어쓴 것이고 ‘정인지서’는 ‘어제 서문’을 자세히 풀어쓴 격이다. 책 전체로 보면 어제 서문은 책머리글, 정인지서는 책꼬리글 구실도 하므로 중간의 예의와 해례를 문자 설명으로 보면 삼원 구조라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르는 이유

‘정음해례’의 ‘해례’라는 말을 따서 ‘해례본’이라 부른다. ‘해례’란 자세히 풀어쓰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는 뜻인데,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기도 해 그렇게 부르는 의미도 있다. 또한 문자와 책 모두 ‘훈민정음’이라는 같은 명칭으로 불리므로 구별을 위해 흔히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을 ‘해례본’이라 부른다.

‘정음편’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세종이 지은 어제 서문과 28자에 관해 간단히 풀이한 예의다. ‘정음해례편’도 크게 ‘해례’와 ‘정인지서’로 구분된다. ‘해례’는 다시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의 ‘5해 1례’ 부분과 ‘정인지서’(정인지 서문)로 나눈다. ‘정인지서’는 맨 뒤에 있어 일종의 꼬리말(에필로그)이지만, 세종실록에서 ‘정인지서’라는 용어로 그대로 실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자세히 해설하겠지만 ‘정인지서’는 지금 책의 서문에 담기는 내용과 결론 같은 내용, 책 뒷이야기(편집 후기) 등의 내용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5해 1례’의 ‘제자해’ 등과 같은 제목만 실제 제목으로 나온다. ‘어제 서문, 예의, 정인지서’는 명시적인 제목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어제 서문’은 흔히 쓰는 제목이라 써도 되지만 정확한 말은 아니다. 세종이 직접 지은 ‘어제 서문’은 후대 학자들이 편의상 붙인 명칭으로 정확히는 ‘정음 취지문’이다. 왜 훈민정음을 창제했는지 세종이 직접 밝힌 취지문이다. 다만 책 전체로 보면 서문 역할도 하므로 통칭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정음해례’의 ‘해례’ 부분도 다음과 같이 유기적인 짜임새로 되어 있다. 쓰는 글자 순서에 따라 ‘초성해-중성해-종성해’를 서술한 뒤 ‘합자해’로 실제 글쓰기 원리를 설명하고 그리고 용자례에서 역시 ‘초중종’ 순서대로 사용 예를 들었다.

해례본은 그 당시 모든 책이 그러하듯 세로짜기로 되어 있다. 또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 당시에는 가로짜기로 된 문헌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다. 세종로에 있는 광화문(光化門) 현판을 보면 이런 구조를 금방 알 수 있다. 현판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므로 ‘門化光’으로 되어 있다. 종종 오늘날 읽기 방식처럼 ‘문화광’으로 읽어 웃음거리가 되는 예도 있다. 동양의 오랜 관습이었고 일본은 아직도 일본 글자 특성상 세로짜기 책이 더 많이 나오고 있다.

해례본의 접이식 편집 또한 오늘날과 다른 독특한 방식이다. 그림과 같이 두쪽을 인쇄한 뒤 반으로 접는 제본을 '접이식 편집'이라 하고,  그렇게 만든 책을 '자루매기 제본'이라고 한다. 한쪽 면에만 인쇄한 종이를 인쇄면이 밖으로 인쇄 안 된 쪽이 안으로 접어 마치 자루처럼 되게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다.

접힌 부분을 판의 중심이라 하여 ‘판심’이라 부른다. 〈그림 2〉를 보면 판심에는 ‘正音解例(정음해례)’처럼 제목이 있는데 이를 판심제라 한다. 제목 밑 칸에 있는 숫자를 ‘장차’ 또는 ‘엽’이라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쪽 표시와 같은 구실을 한다. 즉 1엽은 오늘날의 두 쪽에 해당한다. 접었을 때 펼친 장의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 된다.

따라서 훈민정음 쪽수별 출처를 밝힐 때는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정음1ㄱ:2-3]” 와 같이 출처를 밝혀야 한다. “國之語音(국지어음), 異乎中國(이호중국), 與文字不相流通(여문자불상류통)”라는 문장은 ‘정음1ㄱ’ 쪽 2-3행에 실려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보면 전체 글자 수는 5,337자로 한자가 4,790자 한글은 ‘ㄱ, ㅏ’와 같은 낱자와 통글자 포함 547자로 각 부분별 통계는 표와 같다.

해례본은 199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책이다. 578년이 된 종이책이기도 하지만 책의 짜임새로 보더라도 새 문자 해설서와 교육서로서의 품격을 갖춘 인류 최고 수준의 고전이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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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현주 2024-03-20 19:29:29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책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새로운 문자 해설서이고 또 교육서로서도 너무 대단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의 품격을 갖춘 인류 최고 수준의 고전이라고 표하신 것도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창원 2024-03-20 19:29:01
이론서, 실용서, 문자 사상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알려진 훈민정음 국민 필수 교양서가 되는 날을 기원합니다.

전연주 2024-03-20 19:25:18
훈민정음 책도이렇게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33장과 66쪽에 대한 풀이도 신기합니다.

박효훈 2024-03-20 19:23:24
훈민정음 자체만으로도 인류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데 그 해례본의 창간에서도 그 체계성의 우수함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용국 2024-03-20 18:47:39
과학적으로 기획하고 출판하신 대왕도 대단하시고 그것을 이렇게 분석하고 파악하신 김박사님도 대단하십니다 세계의 보물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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