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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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질
  • 이기인 기자
  • 승인 2024.03.2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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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춘분을 맞아 논갈이를 하고 있다.   


쟁기질 

                              이기인

 

붓을 잡은 하늘이었다

얼음장 밑으로 붓끝의 씨를 떨어뜨렸다

필적을 헤아릴 수 없는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보라를 벗은 새소리가 날아갔다 계단을 걱정하는

바람이 옅게 흩어졌다 흙의 성해포를 찍은 햇빛이었다

연두를 신은 발목이 부었다 망설이던 밭으로

새소리가 들어갔다 밭의 가장자리로 소걸음이 들어갔다

흙의 가족이 놀랐다 흙의 가족들 가죽이 벗겨졌다

내장의 크고 작은 돌이 쏟아졌다

직면한 삶을 파헤치던 삽날이 점점 의식하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춘곤이었다 봄의 주조색으로

쟁기는 하얗게 소독되었다 빛나는 어지럼증이었다

이마의 주름살을 핥아먹는 소의 눈알이

한 마지기 흙빛을 들이마셨다 귓속으로 차오르는

방울 소리는 축축하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바람이 왕래하는 소의 속눈썹이

붉은 밭을 가두고 콧물을 흘렸다

 

낮의 길이가 밤보다 길어지는 춘분(春分)이다. 논과 밭을 경전 삼아 살아가는 농부의 손발은 이제 바쁘다. 흙의 근육도 슬슬슬 온몸이 근지러운 시간. 소 눈망울이 깨우던 논바닥을 이제는 큰 바퀴가 달린 트랙터가 몸을 써서, 봄을 일으켜 세운다. ‘쾅쾅’ 얼어붙은 흙덩이는 지우개 가루처럼 사방으로 튄다. 이제 논갈이로 뒤집어진 땅에는 첨벙첨벙 농부의 무릎을 적시는 물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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