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역사 '영로(嶺路)'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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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역사 '영로(嶺路)'의 중요성
  • 김현길 교수
  • 승인 2024.04.1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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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죽령-충주, 삼각대를 이루는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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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지역은 백제 → 고구려 → 신라로 이어지면서 일찍이 개착된 계립령(雞立嶺)‧죽령(竹嶺)과 함께 충주가 삼각대를 이루는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삼국은 각기 이 지역을 장중에 넣으려고 분쟁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다.

중원지역은 5세기 후반인 475년 이후에 백제의 영역에서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고구려는 이곳을 국원성이라 하고, 충주고구려비를 세우면서 남진 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하여 551년에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 신라는 중상류지역에서 고구려세력을 북으로 밀어냈다.

신라는 이어 백제마저 물리치고 전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대륙과 직접 교류하는 문호를 확보하였다. 이는 신라의 숙원적 꿈이었던 것으로, 그 중심에 있는 국원(충주)을 소경으로 승격시키면서 통일의 기반을 다져갔다.

충북 수안보면과 경북 문경읍을 잇는 계립령을 하늘재라 부른다. 삼국은 중원지역 차지를 위해 이곳 점령을 우선시했다.   /충주시 블로그 갈무리.

이 지역에서 물러난 백제와 고구려는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신라는 이 지역을 고수하려는 노력 끝에 삼국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대륙의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화려한 중대의 사회를 이룩하였다. 국원지역은 바로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신라의 서울보다 문화적으로 앞서는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신라도 그런 점을 반영하여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삼국민이 화합하는 삼한일통의 통일세계를 이루고자 중원이라 이름하고, 통일 신라를 설계하였다고 보인다. 9주와 5소경의 설치목적도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신라는 통일정책의 기준을 지방의 통치조직에 두고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아울러 고루 안배하여 9주와 5소경의 제도를 경덕왕 16년(757)에 확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일 직후인 신문왕 5년(685)으로 보아야 한다. 통일기의 강수(强首)는 스스로 중원경인(中原京人)이라고 하였음에, 소경의 이름이 서원‧남원‧북원 등 방위적 의미로서 정해질 678년에 이미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방위의 중심은 신라의 서울 경주가 아니라 충주이기 때문에 중원경은 그 중심에서 신라의 통일사상을 펴나갔던 것이다. 중앙탑(탑평리 7층석탑)이 그 상징적 기념물인 것이다.

중원지역 확보전
삼국의 잦은 충돌

삼국의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계립령은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 일찍이 신라가 이 길을 개착하였다고 하는 것은 신라가 발전해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신라는 이 길을 통하여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고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지리적인 위치의 중요성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하겠다.

고구려에 있어서도 남진통일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전진기지가 필요하였을 것이니 바로 이 고갯길과 연한 서쪽의 충주가 최적지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을 국원이라 이름하고 충주고구려비까지 세워서 확실한 영역으로의 자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여 진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551년에 상실한 후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서 온달 장군이 출정하게 된 것이다. 온달은 막연한 한강유역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계립령‧죽령 이서(雞立嶺‧竹嶺 已西)>의 지역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이서’가 충주, 즉 고구려의 남진통일의 전진기지였던 국원의 재탈환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지역이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지름길이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주변의 사정에 따라 이름도 바꾸게 된 것 같다. 우선 계립은 ‘겨릅(삼을 베낀 속, 삼대)’의 한음화(漢音化)이며 이것을 한음역(漢音譯)한 ‘마목(麻木)’으로도 삼국시대에는 호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는 이 지역적인 여건을 감안하여 고개를 중심으로 남북 간에 대사원(大寺院)을 축조하여 영로(嶺路)를 관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의 북쪽에는 석굴사원(石窟寺院)인 미륵 대원사를 세웠으며, 남쪽에는 관음사(관음리라는 부락명에서 추정해 본 것이다. 이곳에도 큰 절터가 있으며 석불상이 있다)를 세웠다고 본다. 여기에서 대원사의 동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대원령이라고 기록이 남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계립령=하늘재
영로 확보에 총력

또한 하늘에 닿을 세라 높은 재라 하여 ‘하늘재’라고 전해 오기도 하니 대원령과 함께 조선 후기의 기록에 보이는 한훤령(寒喧嶺)은 모두 ‘하늘재’와 통하는 한자표기인 듯하다. 신라시대의 계립령 즉, 겨릅→지릅재는 고려시대 이후 실제로 대원령 또는 하늘재로 불리게 되면서 슬그머니 그 영북으로 이동하여 오늘에 호칭되는 ‘지릅재’가 된 것이라 생각해 본다.

계립령이 곧 조령이라 주장하는 분도 있으나 이는 옛 문헌에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잘못된 견해다. 다만 삼국시대에는 계립령이 소용되었으나, 신라의 통일로 인하여 대륙으로의 빈번한 왕래로 인한 지름길로 새로운 고개인 새재(鳥嶺‧조령)가 요구되었다. 이후 고려후기에 와서는 한 때 새재(草岾‧초재) 등으로 기록된 것이 보인다. 계립령과 조령이 갖는 역할은 같다고 할 것이나, 지리적인 위치는 분명히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하늘재라 불리는 계립령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죽령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와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가 맞닿은 곳이다.

편집자주❙ 만승(萬升) 김현길 국립교통대 명예교수는 향토사학자로서 45년 동안 한 길만 걷고 있는 93세의 노익장이다. 김 교수는 중원문화 연구는 물론 충북과 전국의 향토사연구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난해 말 소장하고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관리‧활용하겠다고 한 충주문화원에 넘겼다. 이는 스스로 고령이란 점에서 몇 년 전부터 그동안의 저술 등 자료를 정리하고 회억(回憶)하는 실천적 움직임의 하나다. 앞서 2021년 말에는 만승 제4수상집 ‘회억의 장’을, 2022년 6월에는 향토사연구 등을 정리한 중원문화산고(中原文化散稿)를 출간하기도 했다. 지난 4일에는 80세를 넘기면서 시작한 서예의 개인전 및 김생서집(金生書集) 출간기념회를 여는 등 아직도 활동이 왕성하다. 지난 1월초 향토사연구와 관련해 충청리뷰에 연재하기로 수락했다. 다만 위 두 저서와 스스로의 구술을 기초로 본지가 정리해 싣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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