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에는 손주들 모두 온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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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에는 손주들 모두 온대유”
  • 김진오 기자
  • 승인 2007.02.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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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백현리 노인마을, 설 명절 앞두고 오랜만에 분주
   
▲ 홍종남 할머니(85)는 설을 앞두고 우두커니 신작로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도회지로 떠난 자식들과 손주·증손주를 생각하며 외로움을 달래지만 백발의 할머니에게도 자식 만나는 명절의 즐거움은 감출수가 없다.
보은근 내속리면 백현리에 사는 홍종남 할머니(85)는 신작로(新作路)를 바라보는 일이 무척 잦아졌다. 꼬부라진 허리를 곧게 펴고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싶지만 여든이 넘은 노구는 말을 듣지 않는다.
설 연휴가 나흘이나 남았지만 아침에 해 놓은 밥으로 대충 점심 끼니를 해결한 홍 할머니는 마을 회관 가는 길에 한참이나 신작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난해 아흔한살의 최고령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홍 할머니가 부락의 최고 연장자이자 좌장격이 됐다. 여든을 넘기며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지 않는 곳이 없지만 정신 하나만은 또렷이 유지하는게 고마울 따름이다.

홍 할머니는 5남매를 뒀다. 아들 셋이 청주며 서울에 자리잡고 잘 살고 있고 주름이 깊이 패이기 시작한 두 딸도 오순도순 자식을 키우고 있다.
이번 설은 연휴가 짧아 딸들은 오지 못하지만 아들들과 손주, 증손주들은 모두 내려온다는 기별을 받았다.

“다들 내려온다는데 그렇다고 뭐 할껴…. 집도 좁고 불편하고… 성가시지 뭐”
내뱉는 말은 시큰둥하지만 마을로 이어진 굽이굽이 신작로를 따라 어여들 오라는 속내가 그대로 묻어난다.

동네 사람들은 홍 할머니가 그래도 복받은 노인네라고들 한마디씩 한다. 자식들이 큰 돈을 벌거나 유명한 사람으로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때마다 찾아오고 극진히 모신단다. 지난해 할머니 생신에는 아들딸 가족들이 모두 모였는데 증손주까지 스물네명이나 됐다는 것.

홍 할머니가 사는 백현리는 속리산 자락 아담하게 자리한 자연부락이다. 6·25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한때 70가구에 200여명의 주민이 촌락을 이뤘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고 6·70대 노인들만 30여명이 남아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20년 가까이 이장일을 봤다는 이봉희 씨(66)는 “산골이다 보니 가장 큰 논이라야 1000평 밖에 안된다. 농사도 여의치 않은 마을이 되면서 젊은이들이 하나둘 떠나 명절이나 돼야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백현리는 노인들만 살다보니 부락 한가운데 경로당을 겸해 사용하고 있는 마을회관이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매일 점심을 함께 나누고 심심풀이 화투도 치면서 소일한다.
며칠전에는 노인회장이 마을회관 한켠에 ‘우리 아름답게 늙어요’라는 글을 써 붙였는데 더듬더듬 읽어 봐도 구구절절 맞는 말들이라 오며가며 눈에 익히고 있다.

노인들만 살다보니 무엇하나 풍족한 것이 없다. 군청의 지원으로 충당하는 마을회관 난방비도 빠듯하고 농사지어 몫돈 만지기도 여의치 않다. 산골마을이라 널찍한 논밭도 없고 70대 노인들이라 힘에 부쳐 텃밭을 일구는 정도다.

이봉희씨는 “혼자사는 노인들이 절반이 넘는다.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소일이라야 텔레비전 시청이 대부분인데 한달에 6500원 하는 공시청 요금도 만만치 않다. 아들이나 딸네집 방문도 잦아 집을 비우는 시간도 많지만 공시청 요금을 꼬박꼬박 내야 하는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설을 앞두고 백현리는 제법 분주해졌다. 찾아올 아들 손주들을 맞을 준비에 집안 구석구석 청소도 하고 하루 일곱 번 들어오는 시내버스로 읍내에 나가 가래떡도 해와야 한다. 군 보건소에서 노인들 건강관리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건강실천교실’ 출석율도 많이 떨어졌다.

농한기인 겨울철을 이용해 마을회관을 찾아 고무밴드 일종인 ‘세라밴드 운동’을 매일 한시간씩 강습하는데 설 준비로 참여하는 주민들이 반 이상 줄어든 것.

그래도 백현리 30여 노인들은 마음 하나만은 편하다. 명절이며 휴가철을 맞아 도회지 자식들을 기다리는 재미도 솔솔하고 마을회관을 사랑방 삼아 늘그막에 이웃과 정을 나누는 맛도 있다.

이봉희씨는 “마을에 젊은이들은 없지만 각종 대소사 때 마다 열일을 제치고 달려와 주는 자식들이 있어 산골마을의 적막함도 견딜만 하다. 이 마을에 사는 노인들은 명절을 맞아 찾아온 자식, 손주들로 북적이다 모두 돌아간 뒤의 쓸쓸함 보다 그네들을 기다리는 즐거움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김진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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