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미봉 아래 구름 머무는 첫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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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미봉 아래 구름 머무는 첫동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7.02.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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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마을 탐방>충주시 엄정면 유봉리 소림마을
사람들게만 헐떡고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도 밀어주는 바람을 만나지 못하면 갈미봉을 넘지 못했다. 도계마을을 탐사하기 위해 충주시 엄정면 유봉리를 찾은 2007년 2월24일에도 토담집 굴뚝에서 피어오른 아침 연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준령을 넘지 못하고 사람의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 소림마을 전경.
길은 소통의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단절을 만들기도 한다. 해발 698m인 갈미봉을 사이에 둔 충북 충주시 엄정면 유봉리 사람들과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 사람들은 2005년 531번 지방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새소리를 벗삼아 오봉동 고개를 넘어다녔다. 엄정면 유봉리에서 오봉동 고개를 넘어 원주 귀래장터에 가자면 오르막이 짧고 내리막이 길어서 가는데 30분, 오는데는 시간 남짓이 걸렸다.

   
▲ 별·달·해 농원의 돌편지함
   
▲ 별·달·해 농원의 전경
그러나 경운기 다니는 길이 나고 신작로가 포장된 지금은 더 이상 장을 보러 봇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지 않는다. 이제 충북 사람들은 엄정장에 모인다. 나물을 캐러다니는 사람들만이 느릿느릿 망태기를 채우며 충북과 강원을 넘나든다. 한때 화전민 30여호가 살던 갈미봉 아래 유봉리 소림마을에는 이제 다섯 가구만 남아있다. 그나마 산 아래 첫집은 귀농인 부부가 사는 집이다. 이제는 더 이상 집을 지을 곳도 마땅치 않으니 한 집이 나면 한 집이 들 뿐이다.

1973년 처갓집 논 세 마지기를 부치기 위해 유봉리를 찾아온 임재천(65), 이춘자(67)씨 부부는 이 마을의 최고령 현역 농민이다. 임씨가 이주할 당시에는 18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
임씨는 “1980년을 전후해 화전민들이 모두 떠났지만 나는 그놈의 논 세 마지기 때문에 이주도 못했다”며 “그 당시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임씨는 10년 전부터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다.

임씨에게 울타리도 없이 놓아 먹이는 염소 가격을 물으니 “큰 것은 좀 비싸고 작은 것은 싸다”는 현답이 돌아온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드는 충북사람 특유의 화법이다.
충주시 엄정면은 예로부터 풍수가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괴동리에는 조선 경종의 태실, 가춘리에는 인조의 두 왕자 태실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곳은 또 일제시대 공산주의 운동가로 박헌영, 이현상 등과 함께 남로당 활동을 벌이다가 6.25전쟁 직후 한강 백사장에서 처형당한 김삼룡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때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로 좌익운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글/ 이재표 기자 사진 / 육성준 기자

별·달·해 농원-김백상·이정의 부부
“귀농생활 4년, 세상이 우릴 중심으로 움직여”
비료도 쓰지 않는 완전 유기농, 지렁이 돌아와

   
▲ 별·달·해 농원-김백상·이정의 부부
소림마을에서 가장 먼저 탐사대를 맞이한 것은 목청껏 짖어대는 동네 개들이었다. 마을이라야 다섯 가구가 전부지만 집집마다 기르는 개가 여러 마리인 탓에 순식간에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난데없는 개들의 집단행동에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유봉리 614-1번지에 사는 김백상(60)씨 였다. 김씨는 “차나 한 잔씩 마시고 가라”며 탐사대 일행을 거실로 안내했다.

낡은 기타와 전축, 투박한 주철 난로, 손수 깎은 장승 등 눈에 들어오는 거실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김씨는 ‘음악을 하느냐, 글을 쓰느냐’하는 상투적인 질문에 대해 “듣고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2003년 부인 이정의(54)씨와 함께 귀농한 김씨는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별·달·해 농원이라고 이름 짓고, 비료도 쓰지 않는 완전유기농으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김씨는 “처음 이사와서 땅을 팠을 때는 아무런 생명체도 없었는데, 이제는 지렁이가 돌아왔다”며 “땅을 살리는데만 5년이 소요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말이 농원이지 밀, 콩 등 주식류와 마늘, 채소 등 부식류를 자급자족 수준으로 가꾸고 있다. 복숭아, 매실, 자두 등 농약 없이 키울 수 있는 과일나무들도 구색을 갖추고 있다. 염소와 토종닭은 고기도 고기지만 분뇨를 통해 거름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개들도 여기저기서 가져온 개와 이곳에서 번식한 개를 합쳐 17마리나 된다.

1년 전 승용차 마저 없앤 이들 부부는 외출하려면 한 시간을 걸어내려가 하루 여섯 차례만 다니는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그래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김씨 부부의 설명이다. 고기나 생선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직접 생산하고, 지인들이 유기농산물을 얻어가려는 속셈(?)으로 별·달·해 농원에서 생산하지 않는 돼지고기나 소고기 등을 싸들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일종의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셈이다.

부인 이정의씨는 “도회지에 살 때보다 오히려 찾아오는 손님이 더 많다”면서 “이들이 싸들고 온 물품 때문에 대형 냉장고도 모자라 토굴이나 항아리에도 먹을 것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농번기에는 이곳 생활이 도시생활보다도 바쁘지만 모든 것들이 우리 계획대로 움직인다”며 “우리가 이곳에 묻혀사니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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