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 일구고 덩이쇠 제련하던 ‘큰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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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 일구고 덩이쇠 제련하던 ‘큰고을’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7.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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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탐사>제천시 백운면 방학리 손두안마을
그 옛날 구학산(983m)을 날아오른 학이 왜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쉼없는 날갯짓으로 영동군 황학산까지 날아간 놈도 있고 강원도 원주로 방향을 잡아 황확동, 상학동, 선학동 등의 지명을 낳았다고도 한다. 인근 제천시 봉양면의 학산리, 구학리도 학이 내려앉은 곳이고 차마 구학산을 떠나지 못하고 그 자락에 다시 둥지를 튼 곳이 제천시 백운면 방학리와 운학리라고 한다.

방학리에서 구학산 오르는 길은 자연마을 ‘움실’에서 시작돼 ‘큰골’, ‘손두안’으로 이어진다. 백마저수지 인근에 있는 큰골은 말 그대로 큰마을이 되겠지만 움실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 백운면 방학리 큰골에서 70평생을 살아온 조경행씨는 개인의 인생소사는 물론 마을의 근대사를 줄줄 꿰고 있다. 사진은 이웃집 농사일을 도와주다 손가락 세마디가 잘린 손을 흔들며 탐사대를 배웅하고 있는 조경행씨./ 사진=육성준기자
 
‘움’이 새로 돋는 싹을 지칭하거나 땅을 파고 거적을 덮어 채소류 등을 저장하는 시설을 일컫는다는 점에서 ‘새로 형성된 동네, 우묵하게 패인 곳에 위치한 동네, 농산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던 동네라는 의미는 아닐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떠올려볼 따름이다. 손두안이라는 마을 이름도 예사롭지 않은데 손바닥처럼 생긴 지형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 촌로들의 설명이다.

겨울의 흔적을 봄빛으로 채색하는 비가 내린 3월24일, 방학리 큰골을 기웃거리는 도계탐사대를 동네 터줏대감 조경행(71)씨 가족이 반갑게 맞아들였다. 큰골에서 태어나 군복무 기간 5년을 제외하고는 한시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조경행씨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역사책이었다. 단순히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질문과 동시에 기억의 책갈피를 정확히 펼쳐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입대나 제대 연월일은 물론이고 군대시절에 외웠다는 ‘내무사열의 목적’ 72가지를 줄줄이 읊는 것도 모자라,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인 여교사의 이름부터 천등산 탁사정으로 원족(遠足·소풍)을 갔던 추억까지 소소한 지난 일들을 머릿속에 꿰고 있었다.

여기에다 조씨의 사진첩 속에서 촬영 연대가 6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빛바랜 사진들을 확인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단체사진부터 군입대 기념사진 등 반세기 이상된 사진들만 30여장에 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은니 하나만 달랑 남아 익살스러움이 풍겨나는 얼굴이지만 한때 씨름판을 평정했다는 흑백사진 속의 조씨는 헌걸찬 모습이었다.

화전민 이주사업, 지주들만 남아
현재 큰골에 남아있는 가구는 모두 17세대로, ‘큰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만 조씨가 5년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1963년 9월에는 모두 42가구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1959년 4월부터 백마저수지 축조공사가 시작되면서 품 팔러 온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마을이 크게 번성했다는 것이다.

조씨는 “1959년 5월 군에 입대하는데, 막 저수지 공사를 시작한 동네어귀에서 마을사람들이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수를 놓은 복대(腹帶)를 채워주며 대대적인 환송식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이는 ‘처녀들이 한땀 한땀 수놓은 무운장구 복대를 허리에 두르면 화살이나 총알이 피해간다’는 일본의 민간신앙에 따른 것으로, 일제강점의 잔재로 볼 수 있다.

지금의 큰골 주민들은 밭 한 뙈기라도 자기 땅을 가졌던 지주들이다. 과거 여느 산골과 마찬가지로 산밭을 일궈 생계를 유지하던 방학리의 화전민들은 1974년 정부 정책에 따라 가구당 42만원씩을 받고 마을을 떠나야 했다. 조경행씨는 “자기 땅이 있는 사람들은 보상을 안 해줘서 이주할 길이 없었다”며 동구나무처럼 한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내력을 털어놓았다.

현재 방학리의 생활상은 여느 산골마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언제 이곳까지 개발의 삽날이 들이닥칠지는 모를 일이다. 조씨의 말을 통해서도 과거 이 깊은 산골에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거듭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숲이 우거진 구학산 자락에는 옛 절터인 ‘절골’이 있는데 지금도 기왓장이 산재해 있고 그 면적도 학교를 지을 만큼 넓다는 것이다. 또 기와나 항아리, 사기그릇 등을 굽던 가마의 흔적도 남아있다고 한다. 이밖에 철광석을 녹여 덩이쇠를 만드는 ‘판장부리’도 있었다고 하지만 언제가는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월 속으로 묻혀갈 것이다.

화롯불가에서 ‘어사용’을 듣다
조경행씨의 추억여행에 흥을 돋운 것은 탐사대가 지참한 소주였다. 화롯불에 구운 마른 오징어를 안주로 식전 소주가 한 순배 돌자, “가져올 때는 그 쪽 술이지만 여기서는 내 술”이라며 조씨의 노래자락이 흘러나왔다. 뜨거운 여름날 나무지게를 짊어지고 산길을 오르내리면 불렀다는 애절한 ‘어사용’이었다. 나중에는 이른바 ‘애드리브’가 이어졌는데, “궂은 비 내리는 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서…”로 시작되는 이날 술자리의 권주가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집의 안주인인 연옥란(67)씨가 직접 빚은 농주가 나왔다. 연씨는 남편 조씨가 군복무 중이던 1960년에 혼례를 올렸는데, 종갓집 맏며느리로, 신혼 초부터 과부 아닌 과부생활을 하며 1년 전에 작고한 시어머니의 소상, 대상을 탈상한데 이어 3년 뒤에는 시할머니 삼년상을 치렀다. 또 시아버지 중풍 수발까지 감당하고 나니 ‘효부상’이 주어졌다고 한다.

친정아버지가 ‘소과’에 합격해 훈장을 지냈다는 연씨는 탁월한 기억력에서 남편 조씨와 쌍벽을 이뤘다. 연씨는 자유당 시절 학생들에게 암송케 했던 ‘우리의 맹세’를 생생하게 기억해 냈는데, 그 내용은 ‘멸공의식을 바탕으로 북진통일을 완수하자’는 것이었다.

연씨는 특히 ‘요동 700리’와 일본어 ‘줄넘기 노러 등 어린시절 불렀던 동요를 비롯해 귀동냥으로 배웠을 일본 군가, 남·북한 군가 등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실 조씨 부부의 놀라운 기억력은 비단 암기력 덕택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이 깊었고, 정보의 다양성보다는 사상의 일체성을 강요했던 집권논리의 영향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문 앞까지 배웅나와 손을 흔드는 조씨의 표정은 이랑이 깊게 패인 세월의 흔적 속에서도 맑고 순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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