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압수한 51종 불온서적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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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압수한 51종 불온서적 중 하나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7.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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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로 실린 대한전도, 동해를 ‘대한해’ 표기
   
 
▲ 황성신문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일제의 숨은 속셈을 만천하에 드러낸 위암 장지연. 대한신지지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대한신지지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저술한 일종의 지리 교과서다. 서원대학교 한국교육자료박물관(관장 허원)에 따르면 이 책은 1907년 6월 15일 초판을 발행했고, 1908년 12월 15일 재판을 발행했다. 도계탐사단이 발견한 대한신지지는 1907년(光武 11년)에 발행된 초판이다.

책의 간기에는 저자 숭양산인(嵩揚山人) 장지연, 발행자 남장희(南章熙), 인쇄소 휘문관(徽文館) 등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숭양산인은 ‘위암(韋庵)’과 함께 장지연이 즐겨 사용했던 호다.

또 이 책을 발행한 휘문관은 휘문중고등학교를 설립한 민영휘가 1905년 당시 휘문의숙 내에 설치한 일종의 출판부로, 40종 60권의 국한문도서를 간행해, 개화기 출판문화를 선도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한때 이완용으로부터 피소되기도 했으나 훗날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남정철이 쓴 서문이 2면, 장지연의 서문이 4면, 목차 4면, 권1의 본문 164면, 권2의 본문 140면, 부록 48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충북과 관련된 내용은 경기도와 함께 1권인 건(乾)에 속해있고 나머지 시도는 2권인 곤(坤)에 실려있다.

대한신지지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이 책이 항일 언론인이었던 위암 장지연의 저작이고 일제가 불온서적으로 규정해 전국적으로 수거작업에 나섰던 책이라는 것이다. 최근 경남도민일보에 의해 일제강점기 말 장지연의 친일 저술행적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이 책을 쓸 당시의 장지연은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해 옥고를 치르고, 1906년 대한자강회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는 등 가장 왕성하게 항일투쟁을 벌이던 당시였다. 장지연은 대한신지지를 저술한 이듬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떠난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나라의 지리를 지문지리(地文地理)와 인문지리(人文地理)로 나누어 서술한 순수한 지리서지만 곳곳에 애국정신을 불어넣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실제로 장지연은 서문에서 ‘서양학자가 말하기를 지리학을 가르치지 않으면 애국심이 생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또 본문 내용 중에 ‘본 해안의 최서단에 우수영갑과 진도가 재하야 해협간에 처하니 임진란에 충무공 이순신이 일본함정을 전멸하던 벽파정이 유하야…’ 등 지리에 간략한 임진왜란 전사를 곁들여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특히 이 책에 1권(乾)에는 동해를 아예 ‘대한해’로 표기한 ‘대한전도(현성운 제작)’가 부도로 실려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음성에서 발견된 대한신지지는 부도와 서문 일부(5~6쪽 분량)가 훼손돼 확인할 수 없었다.

서원대 한국교육자료박물관 이향숙 학예연구사는 “대한신지지는 1907년 9월 21일 지리과 교과용 도서로 검정을 받았으나 당시 일본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던 학부로부터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1909년 1월 30일 검정 무효를 당하게 됐다”며 “이때 상당수의 책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수거됐다”고 말했다.

일제는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11월부터 1년2개월동안 자신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해 모두 51종 20여만권을 수거했으며, 이 기록은 당시 총독부 관보에도 남아있다. 결국 음성군 삼성면의 대한신지지는 벽장 속에 숨겨져 일제의 강제 수거를 피한 뒤 100년만에 빛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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