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가물 가막산… 푸르러서 감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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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가물 가막산… 푸르러서 감악산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7.04.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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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탐사>제천 봉양읍 바위로 빚은 만물 ‘기묘’
   
▲ 곳곳에 바위가 돌출된 감악산은 때로는 밧줄에 의지해야하는 등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금강산에만 만물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금강산의 세상만물과 견주는 것이 다소 무리라고 하더라도 등산로 굽이굽이에서 만나는 인면바위와 두꺼비 바위, 석문(石門) 등은 조물주가 금강산 만물상을 빚은 뒤에도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을 이곳에 마저 표현한 것만 같다. 제천시 봉양읍에 우뚝 솟은 감악산(해발 930m)에 대한 찬사다.

원주시 신림면과 경계를 이루는 감악산은 정상에 우뚝 솟은 암봉을 비롯해 곳곳에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돌출돼 있고,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길목마다 만물의 형상을 담은 바위들이 놓여있는 산이다. 원주 쪽의 지명이 신림(神林)인 것도 심상치 않은데, 이는 숲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황림을 달리 일컫는 말이다. 감악산이라는 이름은 정상이 가물가물 멀리 보인다는 의미의 ‘가막산(혹은 까막산)’에서 감악산(紺嶽山)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변모한 듯 하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 1977년 수해로 법당이 무너진 뒤 빗살모양으로 엇쌓은 백련사 축대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충북에서 오르는 감악산 산행은 천년고찰 백련사에서 시작된다. 백련사는 신라 문무왕대인 66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세월의 바람서리에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수십여차례, 1950년 6.25전쟁 당시에도 폭격으로 파손됐으나 7년 뒤 중건할 정도로 끈질기게 향운(香雲)을 이어왔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과 삼성각, 무염당, 보응문 등이다. 백련사 바로 밑에는 절이름의 유래와도 관련이 있는 백련지(白蓮池)라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 흰 연꽃이 핀다하여 과거 ‘백련암’이라는 이름을 짓게 됐다고 한다.

백련사에서 등산객의 발길을 붙잡는 것은 전각도 전각이지만 빗살모양으로 엇쌓은 축대다. 푸른빛을 띠는 다듬은 돌을 정교하게 쌓은 것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1976년 수해로 법당이 무너지자 이듬해 쌓은 것이다. 한때는 산내 암자로 미륵사, 신흥사, 천수암, 은적암,청련암 등이 있었다고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실제로 백련사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면적에 관광객들의 야영이나 취사행위 등을 막기 위한 철조망이 둘러쳐져있어 과거의 사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등산로 주변에는 성돌 또는 축대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널려있어 과거 암자나 성벽, 혹은 누각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백련사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감악산 정상과 그 이름의 유래가 사뭇 궁금한 요부골을 거쳐 문바위 쪽으로 내려오는 산행에는 약 5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하산로를 따라 흐르는 감악산 계곡 주변에는 전원주택 등 건물을 짓기 위해 산을 훼손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래도 제비꽃과 현호색, 괴불주머니 등 키작은 풀꽃들이 지천에 피어있어 자꾸만 등산화 코를 굽어보게 했다. 충북에서도 최북방, 1000m를 바라보는 고산준령에는 아직 겨울빛이 가시지 않았지만 산허리까지 봄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 자라는 동안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알파벳 ‘N’자 모양으로 휘어자란 물박달나무.
글/ 이재표 기자 사진/ 육성준 기자

봄볕 해바라기하는 조병현 옹
7가구만 남은 봉양읍 명도리 밤나무골

   
▲ 혼자 남아 봄볕을 쬐고 있는 조병현 옹을 탐사대원 김사환(화가)씨가 스케치하고 있다.
산골마을까지 봄기별이 찾아든 4월14일, 산림청이 휴양림 성격의 ‘황토마을’을 조성하고 있는 제천시 봉양읍 명도리 밤나무골은 집을 보수하는 인부들의 망치소리만 소란할 뿐 농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가구는 모두 7가구. 황토집, 통나무집을 비롯해 돌너와를 얹은 집까지 각종 생태건축방식을 총동원해 짓고있는 황토마을에 휴양객들이 찾기 시작하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될 정도.

밤나무골 끄트머리에 있는 농가 대문 앞에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조병현(87)씨가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원주시 신림에서 가족을 이끌고 온 조씨는 2남1녀 가운데 큰 아들인 복현(60)씨 내외와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몸이 아파 꼼짝하기도 힘들다”는 조씨는 아들 내외가 밭에 나간 사이 목도리처럼 감기는 봄볕을 쬐는 것으로 소일하는 것이 하루일과다. 그러나 집 근처에 개간한 너른 사과밭과 튼실하게 자란 엄나무가 과거 조씨의 일솜씨를 짐작케 했다. 조씨는 “아침밥 먹고 제천장까지 40리길을 떠나면 해가 떨어져서야 돌아왔다”며 “장날, 콩·팥을 자루에 메고가서 술 먹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며 젊은 날의 호기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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