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재 이상설 서거 90주기
헤이그 특사파견 100주년 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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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서거 90주기
헤이그 특사파견 100주년 기념사업
  • 권혁상 기자
  • 승인 2007.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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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선생의 서거 90주기 추모식이 22일 진천군 진천읍 숭렬사에서 열렸다. 진천 출신의 항일 우국지사인 보재는 올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이재정 통일부장관)가 주도한 90주기 추모식에는 이용희 국회부의장, 유영훈 진천군수, 이효우 경주 이씨 중앙화수회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등이 참석해 제향을 올렸다.

기념사업회는 오는 6월 서울에서 이준 선생 기념사업회와 함께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 기념 역사 사진전'과 국제학술회의를 갖고 10월에는 보재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는 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대한제국의 촉망받는 신진 관료로써 일제의 을사늑약에 저항해 관직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올라 48세에 러시아 땅에서 생을 마감한 충북의 우국지사 보재 선생의 행적을 되돌아본다.??

보재는 1870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때 같은 경주 이씨 문중이었던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돼 상경한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익혀서 이미 20대에 율곡 이이를 일찍 따라 갈만할 학자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해 관직으로 나섰고 비서감, 비서랑을 거쳐 27세의 나이에 성균관 관장이 됐다. 이후 한성사범학교 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선교사인 헐버트를 만났고 서양 신학문에 빠지게 된다.

마침내 1905년 의정부 참찬에 발탁됐으나 얼마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조약파기운동에 앞장선다. 국내 활동이 제약을 받자 이듬해 만주 용정으로 건너가 서전서숙을 세운다. 서전서숙(瑞甸書塾·현 중국 용정 실험소학교)은 보재 이상설이 이동녕, 여준 등과 함께 1906년 만주에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항일활동을 벌이던 보재는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아 이준 열사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한다.

그해 4월 서울을 출발한 이준 열사는 5월 하순 러시아에서 이상설·이위종 열사와 합류한뒤 한 달이 넘는 먼 행로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특사였다. 이상설이 정사(正使)였고 이준이 부사(副使), 이위종(주러시아 한국공사관 참서관)은 통역! 관 역할을 맡았다. 이위종의 부친은 대한제국의 초대 러시아주재 상주 공사였으며 경술국치(한일병합)뒤인 1911년 망명지 러시아에서 자결한 이범진 선생이다.

고종의 러시아 망명 추진계획 세워
하지만 당시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상실된 상태라 3특사는 대표단으로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회의장에 입장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3특사는 포기하지 않고 각국의 언론사 기자들을 만났다. ‘만국평화회의보’의 편집인이었던 스티드는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상세히 소개해 대표단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또한 한국 대표들을 위해 기자클럽 연설회를 주선해 각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이위종의 프랑스어 연설에 대해 현지 언론은 “3명으로 이루어진 한국 대표단은 지난 밤 국제협회의 귀빈이 되었다. 각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비넨호프의 평화회의에서 들을 수 없던 것, 즉 한국독립의 폭력적 파괴에 대한 한국인의 호소를 들었다(이하 생략)”고 전했다.

이위종의 연설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한국을 동정하고 일본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행동적인 제안이 아닌 한국인에 대한 동정안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만국평화회의를 이용해 외교권을 되찾으려는 3특사의 노력은 실패했지만 일방적인 을사늑약이후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처음으로 알린 의미있는 기회였다.

헤이그 특사파견이 실패하자 국내에서는 일제에 의한 궐석재판이 열려 보재는 사형,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이 선고됐다. 보재는 국내 입국을 포기하고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보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승희 등과 항카오 남쪽 봉밀산 부근의 땅 45만평을 사서 100여 가구의 교포를 이주시키고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한다. 하지만 일본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1년동안 러시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1911년 풀려난 후에는 권업회를 조직해 신문, 잡지를 펴내며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주력했다.

또한 1914년 한흥동을 기반으로 대한광복군 정부라는 망명정부를 세워 외교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는 고종을 비롯한 주요 황족들을 망명시켜서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듬해 3월 상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화, 유동열 등과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본격적으로 황족의 망명거사에 착수하게 된다.

‘몸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마라’
신한혁명단 외교부장인 성낙형을 국내에 잠입시켜서 가장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의친왕을 비롯한 주요 황족들을 접촉했다. 고종을 알현하기 직전 성낙현이 잡히는 바람에 무산됐지만 보재다운 대범한 책략이었다. 당시 일제는 국제무대에서 대한제국과의 합병은 평화적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만일 고종이나 의친왕이 국외의 망명정부로 가서 투쟁전선을 펼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다. 을사늑약 이후 12년간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한 보재 선생은 1917년 3월 2일 망명지인 러시아 우스리스크 송황령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럽과 미국, 중국, 러시아를 오가며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던 보재 선생은 1년간을 투병하다 천추의 한을 품은채 운명했다.

헤이그 특사 3명의 활약상 가운데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회자되는 것은 이준 열사의 최후 모습이다. 국내에서는 할복자살로 알려졌으나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병사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현지에서 이위종 열사가 언론에 밝힌 내용은 “몇 시간 동안 그는 의식을 잃은 듯 누워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쳤다. ‘내 조국을 구해 주십시오. 일본이 대한제국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가 전부였다. 단식 끝에 순절했다는 설, 종기를 수술하다 세균 감염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확인되지 않은 풍문이며 할복자살이 아닌 것 만은 분명하다.
/ 권혁상 기자

무덤없이 러시아 유허비, 중국 기념관 세워

지난 2001년 보재 이상설의 유허비가 러시아 우스리스크 수이푼강 언덕에 세워졌다. 그가 조국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유언에 따라 자신의 뼛가루를 뿌린 곳이다. 사후 96년만에 유허비를 세운 ‘수이푼강’은 발해 멸망당시 수많은 병사와 백성들이 이 강물에서 죽어 유민들이 ‘슬픈강’이라 부른 것이 이름이 됐다고 전해진다. 서글픈 한민족의 역사가 흐르는 그 강물을 보며 보재 선생은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항일동지 이동녕·조완구는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하여 재를 수이푼강물에 뿌렸다.

지난 2000년 보재 선생의 기념관이 생전에 항일무대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시에 건립됐다.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서전서숙을 열어 항일 투사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던 중국 지린성 룽징시 룽징중학교 교정에 330㎡의 ‘보재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에는 고종의 헤이그밀사 신임장, 만국평화회의 관련 외교문서, 서전서숙 당시의 교육 교안, 고종황제에게 올린 상소문 및 선생의 독립운동관련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당시 청주 이상록 옹이 부회장을 맡아 경주 이씨 화수회 주도로 1억3000만원의 건립기금을 모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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