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님 살던 나리실…동구나무만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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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님 살던 나리실…동구나무만 우뚝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7.05.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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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탐사>제천과 등댄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2리

   
▲ 제천시 송학면과 인접한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나리실 마을은 입구에 서있는 동구나무가 내력을 말해주듯 한때는 큰 마을이었다. 나리실 큰골에 사는 이재관씨가 암소에 쟁기를 매고 밭을 갈고 있다. / 사진=육성준 기자
세월이 지우개가 되어 길을 지웠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2리에서 충북 제천시 송학면 오미리를 걸어서 넘는 ‘나리실 고개’는 가파른데다 오솔길마저 끊겨 오르막도 내리막도 개미지옥처럼 미끄러웠다.

오미리에 학교라고는 없던 시절 초등학교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으로, 중·고등학교는 이 고개를 넘어 영월군 주천면으로 다녔다는데, 이제는 수많은 발길에 닦여 반지랍던 길 위에도 잡목만이 무성했다.

나리실 고개가 있는 야산의 이름은 지도에도 없다. 송학면 주민들도 원주시와 영월군의 경계인 비산(飛山·694m)의 줄기인 이 산의 부분 부분을 나리실 고개, 방갓재, 선바위 등으로 부를 따름이다.
오미리 나랭이마을에서 태어나 56년을 살아온 오미리 이장 심재덕(56)씨는 나리실 고개의 유래에 대해 “어른들로부터 ‘나리님이 넘던 고개라 나리실 고개라고 부르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나리’는 알려진 대로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는 말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넘나들던 고개인지는 막연하기만 하다.

그래도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2리의 동네이름이 나리실이고, 동네 어귀 당거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릅나무와 비술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어 벼슬깨나 하는 사람이 살았다는 역사적 가설에 설득력을 보태준다.

아직도 소로 밭가는 궁벽한 산촌
영월군 주천면 나리실 마을에서 가장 큰 마을은 이름 그대로 ‘큰골’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람이 사는 집은 단 세 채에 불과해 큰골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마을탐사를 위해 큰골을 찾아간 4월28일, 이 마을 토박이인 이재관(74)씨가 암소에 멍에를 얹고 쟁기를 달아 밭을 갈고 있었다. 쟁기질이 처음인 듯 3년생 암소는 밭고랑을 돌아 나올 때마다 겅중거리며 이씨를 애먹였다.

이씨는 “겨울에 끌개(흙을 고를 때 쓰는 농기구)를 매달고 연습이라도 시켰어야 하는데…”라며 멋쩍어했다. 역시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박수길(75)씨가 밭갈이를 거들어보지만 간 질환 등 오랜 병고에 시달린 박씨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박씨는 마을탐사대가 등산객으로 비친 듯 “공기 좋은 것 말고는 볼 것도 없는데 여기는 뭣 하러 왔어?”라며 객쩍은 인사를 건넸다.

큰골 막바지에서 만난 이옥분(가명·70)씨는 “5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논 7마지기와 비탈밭을 혼자 부치며 살고 있는데, 그래도 기계로 심고 약만 뿌리면 되는 논농사가 쉽다”며 “밭에 거름 50포를 뿌려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서 큰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모두 7남매를 뒀는데, 두 아들은 경기도 등 객지에서 도배사와 중장비 기사로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이재표 기자

3년째 움막 생활하는 장우범 목사
“이 시대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통도 필요”

   
▲ 3년째 움막생활을 하고 있는 장우범 목사가 탐사단에게 자신의 종교철학을 역설하고 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2리에서 나리실 고개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쇠파이프로 뼈대를 만들고 비닐을 덮어 간신히 눈비를 가릴만한 작은 움막이 있다. 비탈밭을 부치는 농군들이 만들어 놓은 농막처럼 보이지만 입구에 붉은 십자가가 있는 것으로 미뤄 기독교인의 기도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움막의 주인은 뜻밖에도 제도권에 속해있는 장우범(62) 목사였다. 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장 목사는 서울시 장안동 모 교회의 담임목사로, 교회운영은 부목사에게 맡겨놓고 2005년 5월부터 이 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흰 진돗개 한 마리가 유일한 동거인이다.

장 목사는 “높은 위치에 있으면 위만 보이는데, 낮은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됐다”며 “이 시대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 목사의 산중 생활은 세상 문명과 한참은 동떨어져 있다. 계곡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난방도 하지 않다가 지난 겨울에야 구들을 놓았다.

“냉방에서 잘 때는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는데 지난 겨울에는 15도 밖에 안 내려갔다”는 장 목사의 말은 산중 생활이 고행에 가까움을 입증하는 것. 그러나 장 목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장 목사는 “전기를 당겨오면 누가 TV도 갖다놓고 인터넷도 하고 싶어질 것 같아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장 목사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교회가 날로 혼탁해져가는 상황에서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찾지 않을 수 없었다”며 “앞으로 기도원 등을 설립해 더욱 기도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 장우범 목사가 불을 피울때 사용하려고 직접 만든 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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