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군도 쫓겨간 제천 덕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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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도 쫓겨간 제천 덕주산성
  • 충북인뉴스
  • 승인 2007.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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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망국 한이 서려있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산성(德周山城), 험준한 소백산맥을 주축으로 신라와 백제 고구려 3국이 국경을 이루어 곳곳에 성을 쌓고 전쟁을 벌인 곳 중의 한 곳이 덕주산성이다.

성의 이름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천년의 사직이 고려 왕건에게 빼앗기는 것이 서러워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다 월악산 자락에 머물며 누이동생 덕주공주와 성을 쌓고 고려와의 항전을 고집했던 곳이라 덕주산성이라 지어졌다.

필자가 1976년도 평생동안 우리나라 성곽을 연구하다 고인이 된 고 이원근(李元根) 박사의 권유를 받고 처음 찾아간 덕주산성은 아치형의 출입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붕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장대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월악산 주변의 험한 산세와 평지를 조화롭게 높이에 따라 성을 계단식으로 쌓고 가파른 절벽을 주도면밀하게 틈새 없이 축성한 기술은 대단해 보였다. 어떤 곳은 벼랑이 높아 손이 닿지 않는 곳도 자연석으로 쐐기를 박아 성을 쌓았다. 이원근 박사의 말대로 덕주산성은 난공불략의 성이었다.

옛 기록을 보면 덕주산성은 충주 동쪽 45리 모녀현(毛女顯) 지맥이며 청풍 남쪽 50리 월악산에 있다고 하고 그 산세가 몇 개의 골에 걸쳐 있고 한 지역이 청풍에 속해 있어 고성(古城)자체가 완전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주산성의 규모는 둘레 길이가 32,670척(尺)이고 높이는 3m에 이른다. 1976년 답사 당시는 성곽의 많은 부문들이 훼손되거나 붕괴되어 있었고 홍예문만 남아 보기에 꽤나 허전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곳을 복원하고 건물까지 지어 옛 산성의 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 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은 갖춰 났다.

우리나라 석성은 산세를 이용해 둥글게 쌓는 것이 대부분이고 수원성과 같이 도읍지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한 성은 길이는 짧지만 높은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덕주산성은 남쪽과 북쪽 ,동쪽 계곡을 차단해 성을 쌓았기 때문에 길이는 짧지만 성안이 면적이 넓어 많은 수의 군대가 주둔할 수 있었고 심지어 농사를 지을 정도의 공간도 가능했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주요 위치는 평지에 있지만 남쪽과 북쪽이 좁은 협곡으로 적군이 일시에 많은 병력으로 공격할 수 없어 적은 병력으로 방어가 가능하다.

즉 경상도 문경쪽에서 넘어 온 적은 남문에서 막고 한강과 충주쪽에서 몰려 온 적군은 북문에서 막을 수가 있다. 만일의 경우 남쪽과 북쪽이 모두 뚫리면 마지막 동문의 좁은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이다 힘이 모자라면 군사들은 월악산 능선으로 올라 어느 곳으로나 탈출이 가능한 지형적인 특성을 가졌다.

성곽 전문가들은 이런 덕주산성의 특징 때문에 여러 가지로 연구가치가 높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덕주산성과 충주 인근은 대몽항쟁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6차례에 걸친 몽고군이 고려를 침범해 많은 지역들을 유린했으나 김윤후 장군이 이끄는 충주산성의 군대들은 몽고군에 밀리지 않고 이 지역을 지켜냈다.

충주산성에서 패퇴한 몽고군은 덕주산성으로 쳐들어 갔으나 충주산성의 패전으로 전력의 손실이 워낙 컸고 갑자기 내린 소나기와 청둥 번개 등의 예사롭지 않은 조짐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 이후 다시는 충주 이남의 공격은 하지 못했다.

충주는 이와 같이 몽고군의 침략 초기부터 끝까지 성을 지킬 수가 있었던 유일한 대몽항전의 기록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254년(고종41년)에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때 예성(蘂城)이란 호(號)도 주어졌다.

덕주산성은 조령관문과 함께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서울과 영남을 오가는 삼남의 대로로서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던 곳이다. 덕주산성 인근의 송계초등학교 자리는 명성황후의 별궁인 월악궁이 있었던 곳이다.

1892년 (고종29년)부터 1894년까지 3년간 충청, 경상, 강원, 전라 4개도의 3년간 대동세(大同稅)를 재원으로 4개도의 이름난 목수와 석공, 기와공을 불러 들여 명성황후의 별궁을 짓게 했다.
월악궁은 높이가 20척이고 두께가 2.5척의 돌성으로 사대문과 앞문 수구문이 있는 큰 성이었다고 한다. 그 크고 웅장한 월악궁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해보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다.

덕주산성 주변에는 여러 문화재들이 있다. 동문을 통과해 월악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덕주사와 마애불이 있고 남문에서 1km 남짓 거리에 사자빈신사지석탑이 남아있다. 그리고 남문쪽으로 4km 정도 오르면 유명한 석굴사원인 미륵대원이 있다.

이렇게 덕주산성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과 애환을 함께 했고 주변에는 볼 만한 문화재도 많이 있다. 주말에 가족이 함께 월악산의 덕주산성을 찾아 역사의 자취를 하나하나 찾아 밟아 보는 것도 재밌는 산행이 되지 않을까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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