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통로 ‘橋梁’을 찾아서’10 - 전남 병영 홍교
상태바
‘세상의 통로 ‘橋梁’을 찾아서’10 - 전남 병영 홍교
  • 충청리뷰
  • 승인 2003.05.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남 병영 홍교(兵營 虹橋)

조선후기 지방 건축술 ‘백미’
용의 머리 돌출시켜 물의 神인
용왕이 진호(鎭護)케 하고...

신분의 차이 초월한 사랑의 전설 담아
전남 강진군 병영면 일대는 전라 병마절도사의 주둔처로서 조선 태종 17년에 설치한 군사 요충지였다. 이 곳 병영지역은 천혜의 전략적인 요충이 될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방이 험산으로 둘러쌓여 있는데다 수인산성이 든든한 배경으로 남해를 굽어보고, 이 전략적인 요충지를 가로지르는 금강천도 그러한 조건을 더욱 뒷 받침한다.
이같은 군사지리적 자연조건과 전라 병영성이라고 하는 국가의 군사시설이 어우러져 조선시대 병영의 역사는 발전되어 갔다.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 해안과 중국 연안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매우 심했다. 고려 충정왕 2년(1350)부터 고려가 망한 1329년 까지 43년동안에만도 왜구는 무려 468회나 쳐들어 와서 해안에서 50리 안에는 도무지 사람이 살수가 없었다. 조선이 들어선 후에도 왜구의 강도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태종 17년(1417)년에 광산(지금 광주광역시에 포함된 지역)에 있던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를 바다가인 도강현(지금 병영면)으로 옮긴 것이다.지방에 주둔하는 군영을 일컫는 병영이라는 일반명사가 아주 지명으로 굳은 것이다. 당시에 쌓았던 병영성은 평지성으로 지금 그 일부가 남아 병영 국민학교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종때의 조사에 따르면 둘레가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5개소, 우물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멜이 머물던 전라 병영
이 성은 표류기를 저술해 우리나라를 처음 서양에 소개한 하멜(hamel hendrik ?~1692)등 네덜란드 선원 33명이 1656(효종7년)~1663(현종4년)까지 7년간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강진 병영이 함락되어 성을 쓸 수 없게 되자 전라도 병영은 선조 32년(1599)에 장흥으로 옮겨졌다가 5년만에 다시 강진으로 돌아왔다. 갑오농민전쟁때(1894)는 농민군이 병영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듬해에 강진병영은 폐영되었다. 오늘날 옛 병영은 병영면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라는 말을 듣던 병영 사람들의 장사 수완과 강인한 기질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이 발발의 거점이자 보루였고,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최대의 공격목표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병영성은 거의 불에타고 격렬한 전투로 말미암은 파괴의 잔흔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사실 이렇게 본다면 병영지역의 역사와 문화사에서 이같은 전라병영성의 존재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배경이었다고 할수 있는 것이다.
이때 병영과 통행하는 군사훈련소 출입구에 다리를 까치내에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병영홍교다. 다리의 모양을 반달형으로 했기 때문에 무지개 다리, 즉 홍교라 했다. 장방형의 무사석 74개로 높이 4.5m, 너비 3.08m, 길이6.75m크기로 놓고 내부는 잡석으로 보강하였던 것인데 지금은 홍예 부분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 미적인면이나 건축공학적인 면을 엿볼수 있다.

홍예의 중앙 무형무사에는 용의 머리를 새겨 돌출시킴으로써 물의 신인 용왕이 진호하는 의장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후기의 지방 건축술의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는 우수한 유적으로 기록에는 배전각홍교라 하였다.
이 다리 축조에 얽힌 사내 유총각과 부유한 주인의 딸 김낭자 사이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전설은 병영의 분위기와 대조적이다. 지금으로부터 약3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 병영면 상림리 토호 김씨일문이 있었다. 양반가문으로서 세도가 당당할 뿐 아니라 부농(富農)인 지주로서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비복(婢僕)만도 수십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총각은 원래 양반집의 후손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하여 비록 김씨집 종살이를 하고는 있을지언정 미목(眉目)이 준수하고 재기(才氣)가 남달리 영특하였다. 어렸을 때 받았던 교육의 효과라고나 할까 성실 근면하고 품성이 온후충직(溫厚忠直)해서 모든 언행심사(言行心思)까지도 단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숭상접하(崇上接下)에 있어서도 나무랄데가 없었기에 다른 노비들의 시기보다는 오히려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주인 내외분의 신임이 두터웠으므로 내정출입(內庭出入)뿐 아니라 특별히 가야할 심부름은 유총각이 도맡아서 하곤했다.

이러한 것을 주인집 따님인 낭자가 모를리없다. 낭자야말로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심방규수가 아니던가. 김낭자의 유총각에 대한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연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자신을 꾸짖어 보았으나 그건 잠깐이고 마음은 점점 유총각으로 굳어져 갔다. 하지만 주인과 노비의 신분이라는 점과 당시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전통사회에서 주위의 이목이 두려워 어쩔 도리가 없이 세월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다. 김낭자는 마음을 달랠겸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산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

그날따라 유총각도 집안에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하러 올라갔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한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 맑고 깨끗한 날씨가 천지신명의 조화인지는 모르나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하늘을 뒤덮더니 지축을 흔드는 뇌성과 함께 무서운 번갯불이 번쩍이면서 억수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갑작스런 소낙비를 만난 김낭자는 피할 곳이라고는 큰 소나무밑으로 몸을 은신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마침내 유총각도 나무를 하다가 억수같은 비를 만나 이를 피한 곳이 바로 김낭자가 피한 큰 소나무였을 줄이야!! 비에 흠뻑 젖은 김낭자는 반가운 생각보다는 부끄러운 생각에 피해서 도망치려 했다. 김낭자를 발견한 유총각은 자기도 모르게 김낭자를 붙들었다. 그러던 순간 짓궂은 날씨는 더욱 변덕을 부리듯이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는 두사람을 더욱 떨어질수 없게 만들었다. 두 남녀는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서로가 사랑을 고백하며 먼 장래를 굳게 약속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십삭이 차서 옥동자를 낳았다. 어린아이는 유총각과 김낭자를 닮아 준수하게 생겼고 비범한 아이로 자라 열살 미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외가에서도 아이가 비범하고 영특함으로 귀여움을 받고 자라났다. 학문에도 정진하여 과거마다 훌륭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위로는 상감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고, 아래로는 부하들의 존경을 받아 점차로 요직에 승진되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 이가 곧 후일의 숭록대부 유한계(劉漢啓)정승이다. 양반집 머슴이던 유총각과 주인집 규수인 김낭자 사이에서 태어나기는 하였으나 이는 하늘이 낸 훌륭한 인재였기에 정승이 되었으므로 병영에서는 유정승의 높은 벼슬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유정승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목 배진강에 이와 같은 홍교를 가설하게 된것이라 전한다.

한편 유정승은 죽은 뒤에 정승의 직책이 내려져서 “죽은 후 정승”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현재의 냇가는 상림에서 삼인리쪽으로 물이 흘렀는데 그 고을에 정승이 나면 냇가를 다시 만들어 홍교를 가설해야 한다는 옛말에 따라 현재와 같이 병영성 뒤로 물길을 돌려 홍교를 가설했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마을 주민들은 목화씨앗을 가지고 홍교로 간다. 그리고 다리 위를 자기의 나이 수만큼 걸어 다니면서 씨앗을 사방으로 뿌렸다. 이 민속행사는 해방후에 끊겼는데 왜 행했는지의 내력은 밝혀지지 않는다. 당시 면소재지 주민들도 참여하기 위해 오곤 했다고 한다.

-청주건설 박물관 손광섭 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