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증약 찰방역의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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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증약 찰방역의 가교
  • 충청리뷰
  • 승인 2003.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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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의 호령에 모기떼도 달아난 전설 간직

충북 옥천군 안내면 장계리에 있는 이 다리는 하천 바닥에 긴 장대석을 놓고, 그 양쪽 끝에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교각(橋脚)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그 위에 넓고 긴 상판석을 얹어 놓았다. 교각은 3개가 남아 있으며 교각 1개는 유실로 인해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문무왕(661~680)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본래는 군북면 증약리 마을앞 경부선 철로자리에 있었으나, 철로 공사로 인하여 증약마을 입구로 옮겼으며 그 후 수해로 인하여 2001년 4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12호.
 이 다리의 길이는 6.9m, 폭 2.2m, 높이 1.75m로서 옛날 서울을 오르내릴 때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다리가 있는 증약은 찰방역(아래 상자 기사 참조)이 있던 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을 것이 뻔하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강감찬 장군의 일화는 이 지역 주민들의 입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즉,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신라 땅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천년 도읍지로서의 긍지와 신라인들의 자부심등이 뿌리박혀 있어 고려에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주 부윤을 보내면 통치를 못하고 밀려나기만 하므로 지용을 겸비한 면장 강감찬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게 되어 이곳에서 하루저녁 쉬게 되었는데, 그날밤 고을 주민들은 장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 장군의 솜씨로 청석교 일대에 득실거리는 모기떼를 없애달라고 건의했다. 주민들의 말을 듣고 실제로 청석교를 가보니 수많은 모기떼들이 기승을 부려 다닐 수가 없었다. 장군은 모기떼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모기들아, 아무리 말못하는 미물이라 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당장 내 앞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너희 종족을 멸망 시킬터이니 썩 물러가라”장군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위엄이 있던지 인근의 모기떼들과 수십리 안의 모기들이 벌벌 떨면서 모두 도망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로 청석교에는 모기가 없기로 소문이나 주민들이 매우 신기해 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강감찬 장군의 신통력을 믿고 따라 훌륭한 통치를 하였다고 전한다.


 


■ 옥천 증약 찰방역 □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길목의 중요 역(驛)

찰방역은 공문서의 전달이나 관리들의 왕래와 숙박 등의 편의를 도모하고 관물과 공물의 수송을 돕기위해 설치된 역을 다스리는 중심지를 이른다. 신라 시대부터 처음 시작된 이 역(驛) 제도는 고려때 군사적인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역의 관할은 병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역전(驛田)이라는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한때 22개 방면에 역도를 두고 547개 역을 두었는데 역도에는 역승을 두었고, 각 역에는 역장을 그 아래는 역리와 역정을 두었다. 조선시대들어 역승을 찰방(察訪)이라 고치고 40개 구역에 찰방을 두어 주변 역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 했던 것이다.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있는 증약 찰방역은 전국 40개 중요역 중의 하나로 교통상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이 찰방역은 지금의 증약리, 자모리, 이백리 등의 전 농토를 역둔전으로 지급받아 역을 운영하고 역리가 355명이나 있었고 남여 종복도 500여명에 달할 만큼 큰 규모의 역이었으며 인근 역을 속역으로 다스렸다.

/손광섭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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