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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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만원’
  • 충청리뷰
  • 승인 2003.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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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후배 미술가가 나에게 묻기를, 자기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라는 것이었다. 하릴없는 나는 후배 화가의 작품이 루불 박물관이나 국립 현대미술관에 소장(所藏)되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라는 모범적인 답을 건넸다. 약간 시치름해진 후배는 그런 것 말고 좀 인간적으로 생각을 해보라고 권하는 그 면전에서 나는 미술대학 교수나 저명한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자, 그는 마침내 분기가 탱천하여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획 나가 버렸다. 아니 저 후배의 그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며칠 후에 나는 그야말로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무슨 격식을 버리고 절박함의 진실성에 압살된 나의 탐구력을 가다듬어서 다시 물었다. ‘그래 후배의 소원은 무엇인가?’ 독자 여러분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화가로 입신한 30대 중반의 화가가 무슨 말을 했겠는가를 상상해 보시라. 무엇일까? 그 후배는 잠잠히 있더니 나를 말끄러미 쳐다보고서는 ‘30만원’이라고 말했다. 나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30만원을 빌려달라는 것인지 30만원의 작품자료를 사러 가겠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무안(無顔)스럽게 만들겠다는 도섭스런 어투로 ‘나의 소원은 한 달에 30만원을 버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해서 귀를 의심했다. 한 달에 30만원을 버는 것이라니? 묘연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는 재차 다짐했다. ‘나의 소원은 한 달에 30만원’이라고.

과연 한 개인이나 가족이 삼십만원을 가지고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가? 여기서의 삼십만원은 소득을 뜻하는 것으로서, 예술가가 처한 비극적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 돈의 액수다. 그러니 이 어찌 기막히지 않은가? 또 한 후배는 연극배우인데 지금은 연극을 그만두고 택시운전을 한다. 지난해까지 허허로운 웃음으로 무대에 섰던 그는 택시 안에서 동그란 핸들을 잡고 있다. 그러면서 가끔 만날 때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 후배가 공업용 우지 라면이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연극을 하겠다고 강다짐을 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기 때문이다. 작가(作家)도 그렇다. 유력한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청운의 꿈을 품고 전업작가로서 한뉘의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후배 하나는 지금 독서지도사로 생계를 연명한다. 독서지도사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 입신(立身)한 다음 진솔한 뜻을 펼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만약 이런 내용을 읽고서, ‘예술은 원래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마시라. 그런 분과는 더불어 아무 것도 논하고 싶지 않다. 예술은 도락(道樂)이나 기호(嗜好)가 아니다. 예술가는 이 세상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예술가가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 사회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생존을 해결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와 사회는 그런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 남한은 예술가의 생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남한의 예술가들은 고통 속에서 중요한 건축물을 점거하여 예술가들이 처한 고난을 보여주고 작업할 공간이라도 확보하자고 말한다. 점거는 점령과는 다르다. 점령이 정복과 지배와 같은 폭력의 개념이라면 점거는 공간을 사용하기 위한 공익적 의지에서 발현한다. 점거는 약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저항의 행위이다. 궁핍한 이 시대에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사회적 약자다. 아무리 마음이 풍족하고 또 자긍심에 산다고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예술가들은 정치경제적으로 약자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예술가가 강자(强者)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존재이유가 제각각 다르고 인간의 기능과 역할이 모두 다르듯이 모든 영역은 그 영역 나름대로 고유한 존재의 의미가 있다. 결론을 말하자. 예술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반드시 필요한 이 시대의 공공영역이다. 예술가들의 생존에 국가와 사회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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