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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남은 기업 사라진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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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남은 기업 사라진 기업
  • 김진오 기자
  • 승인 2008.07.01 1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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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둘 일 수 없는 기업과 지역2>

 

글 싣는 순서

지역사회와 기업
향토기업의 성공과 좌절
타 지역의 향토기업
향토기업 해외 진출 사례와 명암
상생을 위한 향토기업과 지역사회의 역할

청주지역 산업발전은 8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해도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해 탄생한 기업들이 주도해 왔다.

   
▲ 한국식 본차이나 개발로 세계 최고 기업에 오른 한국도자기. IMF 당시에도 한사람도 해고하지 않았을 정도다. 사진은 80년대 사원 부모 초청 효도견학 행사.


청주방직과 남한제사 등이 70년대 후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한국도자기도 본차이나를 히트시키며 세계로 시장을 넓히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 향토기업의 색깔이 다양해졌는데 곡물 건조기 사업에 성공한 신흥기업사(1974)와 1962년 설립된 국보제약도 급성장 하고 있었다.

특히 삼화전기(1973), 맥슨전자(1975) 등 전기·전자 업체들도 탄생해 이후 IT·반도체 기업의 과도기를 형성했다.

80년대에는 현재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 꼽히는 (주)대원(당시 대원보방)이 1984년 청주산업단지로 본사를 옮겨 왔고 87년엔 반도체 기업의 맏형 격인 심텍(당시 충북전자)이 설립됐다.

반면 80년대 중반을 넘기며 새로운 시장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들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섬유 분야였다.
청주방직이 전성기를 넘겨 차츰 힘이 빠져갔고 한때 9000명 가까이 근무하던 대농청주공장 또한 섬유산업 쇠퇴 흐름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주력을 모방에서 건설 부문으로 옮긴 대원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 이후 ‘칸타빌’이라는 아파트 브랜드 까지 만들며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릇가게에서 탄생한 본차이나

한국도자기 신화는 창업주 고 김종호 회장이 청주시 상당구 남주동에 차린 삼광사에서 시작됐다.

삼광사에서는 서울에서 사기 밥그릇과 대접, 그리고 크고 작은 접시를 한 트럭씩 싣고와 팔았고 충북 유일의 사기공장인 충북제도사의 특약점으로 지정됐다. 그러던 중 1958년 4대 민의원선거에서 김지준 충북제도사 사장이 당선되면서 삼광사가 회사 지분 전체를 인수, 도자기 사업에 진출했다.

창업 초기 김지준 전 경영주의 부채와 부정이 드러나 한때 회사 인수가 원인 무효 될 위기도 맞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충북제도사가 국가기간 사업체로 선정, 지금의 한국도자기로 이름을 바꾸며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이후 영국 로열덜튼 그룹 산하 존슨 맷시사와 기술제휴로 황실장미 홈세트를 생산해 큰 인기를 얻었고 1968년 국내 최초로 해외시장에 뛰어들어 10만달러의 수출고를 기록했다.

한국도자기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린 본차이나는 황실장미 홈세트가 발판이 됐다. 경쟁업체들이 하나둘 비슷한 제품을 내 놨고 신제품 출시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국식 본차이나 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3년 말 젖소 뼈를 태운 가루를 50% 이상 함유한 최초의 한국식 본차이나가 탄생했으며 디너세트와 커피세트가 만들어져 청와대로 보내졌다. 이를 계기로 한국도자기 제품은 지금까지 청와대 식기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한국도자기는 300장이나 되는 사채카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본차이나 개발에 성공한 1973년을 계기로 ‘부채 없고 어음 안 쓰는 기업’의 이미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 사세가 급성장하고 P.T.한국세라믹인도네시아(1991), 중국강소로제유한공사(1996) 등 해외 법인을 설립하는 등 업계 세계 1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특히 IMF 당시 거의 모든 기업이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감원에 나섰지만 한국도자기는 단 한명의 직원도 내보내지 않는 등 건실 경영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한국도자기는 1970년대 이래 충청북도의 대표적 향토기업으로써 지역경제발전을 선도함은 물론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창업주 고 김종호 회장이 초창기 회사경영의 어려움 속에서도 두 차례나 청주상공회의소 회장(1964년~1970년)을 맡아 봉사했으며 2대 김동수 회장도 부친을 도와 수안보파크호텔, 한국도자기특수판매(주), 한국본차이나(주), 한국도자기리빙(주) 등 오늘의 한도그룹 토대를 마련했다.

아쉬운 점은 3대 김영신 대표 체제로 전환된 뒤 지역 연고성이 큰 폭으로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과 함께 해 온 한국도자기 65년 역사에 자칫 ‘향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 세대 기업

새마을 운동으로 대변되는 70년대 청주지역에도 전기·전자 업종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중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 삼화전기와 맥슨전자다.

70~80년대 초까지 섬유산업이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며 지역경제를 이끌었다면 80년대를 넘기며 그 자리를 이들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삼화전기는 전기 콘덴서와 커패시터(축전기)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청주산업단지를 기반으로 성장, 중국 천진에 까지 진출하는 등 사세를 키워 왔다.

맥슨전자는 80년대 중후반 한 때 4500명의 고용과 3000억원의 연매출을 올릴 정도로 청주지역 대표 기업으로 통하던 회사다.
전화기와 무전기를 생산해 인기를 얻으면서 성장한 맥슨전자는 이후 맥슨텔레콤으로 상호를 바꾸고 IT업계의 주력분야인 휴대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맥슨 텔레콤이 생산하는 휴대폰은 GSM 방식으로 소위 ‘유럽식’ 핸드폰. 하지만 자금난 끝에 부도가 난 뒤 세원텔레콤에 인수됐다.

그러나 2003년 대주주인 세원텔레콤의 영업적자로 인한 금융 부실, 업계 장기적인 불황, 저가 제품과의 경쟁력 상실 등의 각종 악재로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많던 직원도 현재는 몇 십명 수준으로 크게 후퇴했지만 지난 4월 법원이 맥슨텔레콤이 제출한 회생계획안을 인가해 실낱같은 재기의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

이 시기에는 신흥기업사라는 곡물 건조기 전문 기업도 탄생했다.
60~70년대 초 고수익을 올리던 농작물이 잎담배였다. 담배는 정부의 전매사업이었기 때문에 잎담배 재배량도 정부가 지정했고 농민들은 조금이라도 더 재배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당시 연초생산조합에 근무하던 창업주 김호수 회장은 잎담배 재배농가들의 재래식 건조실의 불편을 해소하고 좋은 등급을 받도록 할 방안으로 잎담배 건조 벌크건조기 개발을 결심했고  1974년 청주시 영동에 창업했다.

신흥기업사는 벌크건조기 인기가 높아지고 농민에 대한 보조금 등 정부 지원 확대와 함께 성장했으며 1979년 청주산업단지로 이전하며 본격적인 건조기 보급에 나섰다.

이후 신흥기업사 뿐 아니라 신흥강판과 신흥컨트롤, 충북창업투자 등 계열사를 갖추게 됐으며 연구개발 투자를 늘려 잎담배 건조기에서 일반 곡물 건조기로 제품을 확대해 나갔다.

곡물건조·저장 사일로, 미곡종합처리장, 정미기·현미기, 소각로, 옆바람식 건조기, 고추세척기, 원적외선 곡물건조기 등 신제품 개발이 곧 회사의 연혁일 만큼 수많은 발명·실용·신안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EM마크, 한국A/S 우수기업인증, 신기술실용화우수기업 선정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동탑·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4년에는 8억원을 출연해 남강장학재단을 설립, 장학사업을 펼치는 등 향토기업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섬유업종의 몰락

70년대 전성기를 이뤘던 기업중 남한제사, 청주방직, 대농 등의 이름은 청주지역사회에서 사라졌다. 모두 섬유와 관련된 기업이었다.

남한제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시(郡是)제사㈜의 조선 분공장(分工場)으로 설립된, 엄밀히 말해 일제의 잔해였다. 특히 군시제사㈜ 청주공장은 우수한 제품을 생산해 고이윤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저임금을 유지하면서 나이 어린 유년여공(幼年女工)을 중심으로 한 값싼 노동력을 다수 투입하여 중급품을 생산함과 동시에 누에고치가격을 상대적으로 억제함으로써 고이익체제를 보장받았던 식민지 수탈의 한 형태였다.

어찌됐든 해방이후 군시제사 청주공장은 우여곡절 끝에 ‘일제’의 얼굴을 어렵게 지울고 1949년 12월 27일 남한제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당시 남한제사가 자리잡았던 곳이 옛 시외터미널(현 두산위브 아파트 현장) 자리로 남한제사를 중심으로 재래시장인 사직시장이 번성하기도 했다.

청주산업단지 조성으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상호를 남한흥산으로 변경, 1978년을 기준으로 생사생산 25억1700만원, 부산물 2800만원, 수출 490만7000달러, 내수 9200만원을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수출경쟁에서 경쟁력을 상실, 1986년 업종을 전환하여 수정진동자를 생산했지만 이마저도 2000년 10월 빛샘정보통신에 18억4500만이라는 헐값에 매각돼 간판을 내렸다.

1954년 청주시 우암동 현 상당구청과 상당경찰서 자리에 설립된 청주방직 또한 시장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옛 명성이 크게 위축된 경우다.

전후복구 과정의 물자부족 상황에서 성업을 이루며 1970년대 말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1974년 청주산업단지 제1공단 초입에 현대적인 공장시설을 갖춘 청주합섬㈜을 따로 설립하하며 몸집을 불렸으며 소모사(梳毛絲)를 주로 생산하는 청주합섬이 주력이 되면서 우암동의 청주방직이 사라졌다.
 
청주합섬은 이후 청주방적㈜으로 변경, 하였다. 1982년 산업체 부설학교인 석천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 섬유산업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업전환 등의 이유로 1995년 현재의 서한모방㈜으로 변경하며 지역연고 이미지가 약해지고 청주지역의 오랜 역사를 가진 대표적 섬유기업으로서의 명성도 바래지고 말았다.

섬유산업 쇠퇴의 상징은 단연 대농 청주공장의 폐쇄였다.
대농은 1969년 동양최대 규모의 방직공장을 세우며 청주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대농은 성장을 거듭해 70년대 중반에는 직원수가 8700명에 이를 정도로 도내 최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청주의 인구가 20만에 불과했으니 5가구에 1명은 대농직원이었던 셈이다. 직간접적으로 대농과 연관을 맺지 않은 가구가 없을 정도였다는 어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것.

양백여중과 양백여상은 그래서 더욱 서민들의 애환을 가득 담고 있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딸들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은 극히 드문 일. 어린 딸을 여공으로 취직시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었을 정도로 대농은 지역 산업의 기둥이자 교육의 장소로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것이다.

이런 대농도 모기업인 미도파백화점에 홍콩 M&A 대자본이 들어와 잠식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섬유산업 자체도 쇠퇴해 가며 (주)신영에 매각돼 현재 42층 마천루 공사가 한창이다.

비제조 분야 향토기업은 초토화
건설·금융 IMF 거치며 대부분 합병·퇴출
유통도 대형마트에 밀려 설자리 좁아져

한국도자기나 삼화전기, 대원, 심텍 등 제조업체들이 향토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유통이나 건설, 금융 등 비제조 분야에서는 ‘향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굵직한 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건설과 금융 분야를 중심으로 토종업체들이 성업했다.

삼일주택과 세원, 삼정, 덕일, 경희, 효성, 태암 등 곳곳에 아파트 외벽에 흔적만 남긴채 사리진 건설사들이 줄잡아 10여개에 가깝다.

이들은 주택건설 붐을 타고 상호 맞보증 등 문어발식 경영을 해 오다 IMF 직격탄을 맞고  사라졌거나 자체 사업을 중단한 채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세원, 삼정, 경희, 효성, 태암 등이 부도 이후 크게 위축됐거나 아예 도산했으며 덕일은 용암 덕일마이빌 이후 자체 사업을 중단하고 있다. 삼일도 영화관사업으로 전환한 뒤 건설 부문은 임대아파트 관리정도에 그치고 있다.

거욱이 주택시장이 대기업 브랜드 위주로 재편되면서 지역업체들은 시행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모방에서 건설로 업종전환에 성공한 대원이 ‘칸타빌’이라는 브랜드로 지역 건설을 주도하고 있고 후발주자 원건설이 ‘힐데스하임’으로 오송에 눈도장을 찍은 정도다.

금융 또한 충북은행이 조흥-신한은행에 합병되면서 지역색이 사라졌고 중앙리스와 태양생명보험, 충북투자금융, 대청상호신용금고 등 제2금융권 또한 IMF 직후 인가취소되거나 폐쇄됐다.

유통 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8~90년대 지역 슈퍼체인의 대명사 후생사가 대형마트 입점으로 크게 위축됐으며 향토 백화점 흥업백화점도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경제계 관계자는 “건설의 경우 84년 청주로 본사를 옮겨와 건설업에 진출, 성공한 대원 정도가 건재한 수준이다. 특히 충북은행 이후 지역 금융이 사라졌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다. 유통분야도 외지 자본에 대부분 잠식된 상태다. 지역 경쟁력 차원에서라도 이에 대한 분석과 활성화 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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