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감옥의 단재, 수감방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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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감옥의 단재, 수감방도 몰라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1.1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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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 수감했던 3층 벽에 조선혁명선언만…
“무장투쟁론 日의 더 큰 무력 막으려한 혜안”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구는 한중(韓中) 모두에게 있어 생채기투성이의 땅이다. ‘영시불망(永矢不忘) 즉, 영원히 맹세해 잊지 않는다’는 이 말은 뤼순구에 있는 만충묘 기념관의 현판에 새겨진 글귀다. 중국인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뤼순의 기억’은 청일전쟁 당시 2만여 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치욕의 역사다.

   
▲ 다롄시 뤼순구에 있는 뤼순감옥은 신채호와 안중근을 비롯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장소다. 중국이 문화재로 지정한 이 곳에는 당시의 참혹상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뤼순은 영원히 맹세해 잊지 말아야 할 영시불망의 땅이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조선통감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뒤 암매장 됐으나 아직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곳이고, 단재 신채호 선생 역시 6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936년 불귀의 객이 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신채호와 안중근의 자취를 찾아간 2009년 1월5일 뤼순의 하늘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고, 칼끝 같은 바람도 매서웠다.     
 
韓中人 수감자 연간 2만여 명 달해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됐고, 국력을 소진한 중국은 반(反)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 칭다오(靑島)는 독일의 조차지가 됐고, 다롄은 러시아에게 넘어갔다. 뤼순감옥은 러시아가 동북 3성에서 자신들에게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1902년 건축한 건물이다. 당시에는 약 80여개의 감방이 있었다고 한다.

뤼순감옥이 악명 높은 장소로 바뀐 것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뒤부터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후 1907년 현재의 형태와 규모로 대폭 확장된 것. 총 면적은 약 2만6000㎡로, 275개의 여러 형태 감방이 있으며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공장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다.

   
▲ 신채호 선생이 수감됐던 감방은 아직 고증되지 않은 상태. 다만 정치범 수감동에 역사적인 조선혁명선언의 일부가 부착돼 있다.
건물의 외형은 큰대(大)자 모양의 방사형 구조이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돼 있으며 복도 중간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돼 있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됐는데,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5년 8월 소련 붉은 군대가 뤼순에 주둔하면서 사용이 중지됐고, 1971년 복원을 통해 전시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1988년 중국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했다.

“我와 非我의 투쟁은 정당방위” 
그렇다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뤼순감옥 어디에서 수감돼 있다 유명을 달리했을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고증은 찾을 길이 없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방에 금속제 대형 안내판이 부착돼 있는 것과 달리 단재의 수감 흔적은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의 일부가 3층 정치범 감방 복도에 걸려있을 뿐이다. 전시관으로 변모한 뤼순감옥 복도에는 수감됐던 지사들의 문장들이 전시돼 있다.

단재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베이징 거주)는 이에 대해 “애 아버지(신수범·단재의 장남, 1991년 작고)가 한중 수교 전에 돌아가셔서 딱히 어디인지 모른다. 정치범들은 3층 한쪽으로 수용했다고 하는데, 6년 동안이나 수감이 됐기 때문에 이 방 저 방으로 옮겨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단재연구가인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도 “안중근 의사는 중국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은 중국인들에게도 통쾌한 일이었고 그 당시에도 화제가 됐다”고 밝혔다.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감방은 책상까지 있는 독방. 중국정부가 안 의사의 쾌거를 기념해 안 의사의 얼굴이 부조된 금동 안내판을 부착했다.
이에 반해 단재는 불굴의 지조로 나라사랑을 펼친 실천적 사상가였지만 선생이 항일의 도구로 택한 아나키즘(무정부주의)으로 인해 남북은 물론 활동무대인 중국에서도 후세의 접대가 소홀한 것이다. 

단재 망명루트 기행의 단장인 서원대 허원 교수는 “단재선생이 역설했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은 독립과 자존, 민족의 정체성을 무력으로 짓누르는 것에 대한 항거의 의미였으며, 이는 일종의 정당방위였다. 단재 서거 1년 뒤인 1937년에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군국주의의 야욕을 본격화한 것을 볼 때도 일본이 더 큰 무력으로 성장하기 위해 무장으로 맞서야 한다는 단재의 주장은 혜안에 가까웠다”고 평가했다.  

단재 망명루트를 가다
만주에서 베이징까지 6일의 기록①

나라를 빼앗겨 주권이 없는 상황에서 빼앗긴 역사까지 찾으려한 담대한 사내가 있었다. 아니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세움으로써 나라를 찾으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균관 박사를 지낸 유학자였지만 민중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전용을 주장했고 언론인이 된 뒤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 사내가 바로 우리지역(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이 낳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단재는 1907년 번역서인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시작으로, 을지문덕, 이순신, 최도통(최영) 등 역사적 영웅들의 전기를 집필하며 사위어가는 민족혼에 불을 붙이려했다. 경술국치(한일병합)로 주권이 송두리째 넘어간 1910년, 단재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망명길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단재의 삶과 죽음을 돌이켜볼 때 선생에게 ‘망명’이란 표현은 적확하지 않다. 사전(辭典)에 나와 있는 망명은 ‘혁명 또는 그 밖의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박해를 받고 있거나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는 사람이 이를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몸을 옮김’인데, 단재는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더욱 강건히 싸우기 위해 고국을 등졌기 때문이다. 

싸우기 위해 떠난 망명 아닌 망명가
실로 단재는 블라디보스토크,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에서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살며 고난 속에서도 꼿꼿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일제하고만 싸운 것이 아니라 외교론, 준비론을 펴는 망명가들과도 싸웠다. 1914년 옛 고구려 땅을 둘러본 뒤에는 대고구려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조선상고사, 조선사 등을 썼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이 “(초략)갖가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아니 하노라…(중략)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의리 적음을 꾸짖으려 하지 아니하노라…(중략)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을 갖지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가릴 겨를도 없노라…(후략)”라고 민중의 뒤에서 뒷걸음을 칠 때 단재는 1923년 독립운동의 투쟁정신을 극명하고도 힘차게 천명한 역사적인 문서 ‘조선혁명선언’을 세상에 내놓는다.

조선혁명선언은 조국의 현실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강도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했다”고,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피는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라고 냉철하게 단정하며 시작한다.

선언은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 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균형>의 <노예적 문화현상>을 타파함”으로 귀결된다.

투쟁정신 극명한 ‘조선혁명선언’ 쓰다
천재적인 재능을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쏟아냈던 단재는 1928년 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다가 타이완(臺灣)의 지룽(基隆)항에서 체포된다. 이후 다롄(大連)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감옥에 수감됐으며, 건강악화로 인해 보석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친일인사가 보증을 섰다는 이유로 거절한 채 1936년 2월21일 죽음을 맞는다.

단재가 서거한지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국적조차 찾지 못했다. 절차상의 불가함으로 미뤄져왔고, 그 절차를 바꾸기 위한 법률의 개정도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기 때문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2008년 11~12월 제13회 단재문화예술제전을 봉행한 제전추진위원회는 2009년 1월4일~9일까지 공동대표인 서원대학교 역사교육학과 허원 교수를 단장으로 단재의 망명루트를 따라 해외투쟁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역사기행을 추진했다. 기행은 뤼순감옥을 시작으로, 통화(通化), 지안(集安), 선생이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베이징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 기행은 지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할 예정인 역사교육 프로그램의 준비작업 성격을 띤 것이다.

충청리뷰는 이번 기행과정에서 취재한 내용을 ①뤼순감옥의 단재 어디서 순국했나? ②베이징의 단재 흔적 ③단재와 대고구려사상 ④이덕남 여사 베이징 인터뷰 등 모두 4편으로 나눠 연속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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